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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가을] 4주차: undo는 없다

Library/Club 창작과비평

by 황제코뿔소 2020. 10. 2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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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와 같이 앞으로 다가올 위기들은 풍요로움이 아닌 생존의 문제를 건드릴 것이다. 그 영향의 치명성과 보편성의 정도는 한층 심각할 것이다. 그러한 다음의 위기를 앞두고 현재 우리는 COVID19라는 "리허설"을 치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리허설만으로도 충분히 휘청이고있다. 사실 우리에겐 이 리허설을 무산시킬 기회가 수없이도 많이 있었다. 인류 전체가 경험하고 있는 현 상황의 원인을 중국 일국의 문제 혹은 현 정부의 정책에서 찾아내는 진단은 협소하다 못해 순진하기에 굳이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리허설이 펼쳐지고 있는 무대 위, 즉 의료 현장과 같은 일선에 있지 않다고 해서 '나'와 무관한 문제라고 느낄 수도 있다. 미국 버클리대의 로버트 라이시 교수가 제시한 새로운 4계급의 '원격 근무가 가능한 노동자'(The Remotes)들이 그러할 것이다. 코로나19 이전과 거의 동일한 임금을 받는 이들이 체감하는 코로나19의 영향은 분명 '잊혀진 노동자'(The Forgotten)과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The Unpaid)들에 비해 상당히 미미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영향은 각자의 위치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난다. 또한 위기는 그간의 균열과 불평등을 강화하고 나아가 새로이 만들어낸다. 하지만 코로나19 자체가 그러하듯이 작용/반작용이라는 세상의 이치로부터 그 누구도 완벽히 자유로울 순 없다. 각자의 좌석 번호만 다를 뿐 우리는 지구라는 그리 크지 않은 극장에 다함께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농촌사회학자 정은정이 <저밀도와 소멸위험, 농촌에 코로나 '이후'란 없다>에서 말하듯 "코로나19 이후에 올 것들을 이야기하기 전에 코로나19 이전에도 부족했던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먼저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번 [코로나19가 던진 과제들] 특집은 민주주의, 돌봄, 교육, 농촌까지 삶의 근간이 되는 영역들을 다룬다. 각각은 누구에게나 일상적이고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고유의 테두리를 무심코 잊기도 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내겐 모든 글들이 인상 깊고 유익했다. 이하나가 <코로나19 이후의 학교생태계는 어디로 가야 하나>에서 "정말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던지는 질문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가장 선명한 여운을 남긴 글은 황정아의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이다. 소위 말하는 ‘K-방역’이 코로나19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할 때부터 눈길이 가던 꼭지였다. 하지만 언론이 ‘소개’하는 개인의 자유 대 국가의 개입이라는 프레임 속에 머무른 정도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명과 공동체의 안녕을 해치는 자유는 일정 부분 통제되어야 한다는 그간의 나의 입장을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황정아의 글은 그렇게 깊게 파고든 적은 없다보니 생겨난 어렴풋한 갈증을 탁월하게 해소해주었다.

우선, 간지러운 곳을 속 시원히 긁어준다. 나는 그간 해외 언론의 지적에 불만이 있었다. 확진자의 동선 공개 및 위치 추적을 통한 격리자 관리 등과 같은 국내의 조치를 두고 국가의 자유 침해와 과도한 개입을 지적하는 측면에서 말이다. 나의 불만은 코로나19를 여전히 우한폐렴이라고 부르고 집회의 자유를 운운하며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 국내 일각의 집단(이들을 위한 ‘백신’이야말로 시급하다)들이 그러한 지적들을 활용했기 때문도 분명히 있다. 그렇다해도 단순히 ‘국뽕적’ 불만으로 치부하기엔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황정아는 이에 대해 “국가에 관한 편향적 태도”를 지적한다. “국가를 개인들의 직접적인 반대항이거나 개인들을 포함한 배제의 논리로 분열시키는 힘으로 규정”하게 되면 “방역을 위한 국가의 조치들이 곧장 주권권력의 본질적 경향인 감시와 통제의 (예외적) 강화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국가들이 극심한 불능을 드러내는 팬데믹의 상황에서 실상과 부조리하게 어긋나는 비판”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아래의 대목은 정말 시원하다.

국가의 작동불능에 대한 개탄과 국가주의 강화에 대한 개탄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입장 사이를 매우 편의적으로 오가면서 어떻든 국가 비판이라는 습관적 위치를 고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럽에 대해서는 국가의 실패를, 아시아에 대해서는 국가의 강화를 비판한 한병철의 글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국가 비판의 상투성과 둔탁함도 문제지만 그런 비판으로 정치성을 대체하면서 실제로 어떤 통치가 작동되어야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관심사가 되지 못하는 점이 더 심각하다.”

나아가 황정아는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통제’의 작동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회적 유대가 강하게 남아 있고 국가들이 아직 경제적, 사회적 결과에 더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거부한다. 이에 대해 “고양되고 응축된 민주주의 경험이 방역에 필요한 유대와 책임을 낳”은 것이라는 그의 대안적 설명은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또한 사람들이 민주적인 통제를 왜 기꺼이 따르는지,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통제를 실천하는 집단 주체에 대한 명명의 문제까지 다다르는 분석은 ‘방역과 민주주의’라는 주제 속에서 풍성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사유의 공간을 제공했다. 간만에 읽어 보는 (준)학술적 글이라서 반가웠고 탄탄한 글이라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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