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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가을] 6주차: 팬데믹과 마스크 쓰지 않는 '어른'들

Library/Club 창작과비평

by 황제코뿔소 2020. 11. 9.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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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에 어른들에 비해 아이들이 마스크를 더 잘 쓴다는 뉴스 리포트를 본 적이 있다(인용을 위해 검색을 해보았지만 찾지를 못했다). 아이들이 보다 순응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 그 이상을 근거로 들고 있었다. 그 리포트의 자세한 내용이 무엇이었든 지구 곳곳에서 '마스크 쓰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고 있든 팬데믹 시대에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은 무책임하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질환이나 장애와 같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라면 마스크 착용은 상식이다.

 

우리 삶에서 비상식은 다양한 지점들에서 손쉽게 목격된다. 하지만 팬데믹과 마스크라는 키워드와 관련된 비상식에 남성성을 너무나 당연히 결부짓는 저자의 주장은 전혀 동의가 되지 않는다. 리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후에도 그 이름을 들게 될 기회가 여러 번 있었기에 주목받는 작가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현장편 <팬데믹과 마스크 쓰지 않는 남자들- 남성성의 극단적 이기심, 여성의 늘어나는 돌봄 부담>에서 접한 그녀의 글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균형감(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상이한 해석의 가능성을 얼마나 염두해 두느냐의 여부)이 결여되어 있고 비논리적이라고까지 받아들여진다.

 

 

나의 당혹스러움은 마스크를 더 쓰지 않는 경향을 성별에서 찾는다는 그 자체에서 시작되었다. 젠더차이에 대해서는 나의 체감과는 무관하게 해당 내용을 다룬 기사(www.bbc.com/korean/features-53461310)를 읽어보고 어느 정도 수긍했다. '어느 정도'인 이유는 해당 기사가 인용하는 조사들의 샘플링과 사례들이 얼핏봐도 상당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기사는 각각 미국인 2459명, 105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2개를 인용하고 있는데 n수가 충분하다고 보기 힘들다. 본문에 사진과 함께 삽입된 예시는 트럼프 일가이다. 

 

다시 창비 계간지에 실린 리베카 솔닛의 글로 돌아와보자. 중요한 점은 젠더차이에 대한 (부분적) 수긍에도 불구하고 내가 필자의 글로부터 느꼈던 당혹스러움 그리고 불편함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가 팬데믹 시대에 "남성성의 극단적 이기심"과 "여성의 늘어나는 돌봄 부담"을 읽어냈다는 점은 내게 복합적인 자극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해당 사안에 천착했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젠더차이를 '가부장제'로부터 비롯된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나머지 그 어떠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인종의 문제와 뒤섞어 확대하여 논의하고 있다는 점후자(여성의 늘어나는 돌봄 부담)의 원인을 전자(남성성의 극단적 이기심)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도입부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자다움의 정의가 남에 대한 배려를 조금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일 때, 마스크를 쓰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 되어버린다...만사를 돌보는 것은 납자답지 못한 일이다."

 

이어서 그녀는 팬데믹에서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은 나라 중 4곳의 지도자들이 코로나19 위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이유가 사내다움의 조건을 충족시키는데 열중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우선, 내가 생각하는 '어른다움'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책임감이다. 인간은 대부분의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일신의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다른 인간 및 생명체와 관계를 맺기 마련이다. 그러한 관계에 책임을 지고, 나누는 것이 어른을 아이와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물론 그 책임의 방법과 정도 그리고 범위는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남자다움의 정의가 남에 대한 배려를 조금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일 때"는 필자의 주장에서 반드시 상기되어야 하는 전제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논의되는 "남성성"에서는 그 앞에 "극단적 이기심으로서의", "극대화된"라는 표현만 간간히 등장할 뿐이다. 펜데믹 상황에서조차 '우리'를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어른답지 못함이 아니라 남성성을 읽는 것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일한 시각의 과잉 때문이 아닐지. 또한 특정한 국가들이 코로나19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이유에는 지도자의 무능 외에도 여러 요소들이, 그 무능한 지도자에게는 남성 외의 여러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 남성의 반대편에 "마스크를 만드는 여성"을 가져다 놓는다. "돌봄이 여성의 몫으로 성 구분되어왔듯이"를 수용한다고 해서 마스크를 재봉하는 한편에 그조차 쓰지 않는 양극단이 당연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자들이 마스크를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여자들이 만드는 걸 훨씬 더 많이 보았는데"라는 자신의 경험 하나로 일반화된 스펙트럼을 설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추가적으로 인위적으로 규정된 개념을 즐겨 활용하는 저자의 전개에 경계를 표하고 싶다. 리베카 솔닛은 본 글에서 남성성 외에도 백인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성별과 인종과 같이 개인이 선택하지 않은 요소에 "~성"을 붙여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하고 이를 활용하는 방식은 신중해야한다. 이러한 논의 방식은 딱 맞아 떨어져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간결함과 편리성은 간혹 전형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전형은 경향성을 내포할 뿐 다면적인 측면을 거세한다. 나아가 독자들의 편견을 부추길지도 모른다. 

 

창비에서 계간지의 지면을 이런 글에 할애한 것이 아쉽다. 그 이유가 필자의 네임벨류 때문인지 페미니즘의 '압박'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이번 현장편 글의 효용은 맨 처음 2줄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내 팔을 휘두를 권리는 네 코 앞에서 끝난다"라는 옛 격언을 들으며 나는 자랐다. 이 격언은 개인의 자유와 타인의 권리 사이의 균형, 그리고 타인의 권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개인의 의무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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