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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5-16 청평여행 Day1

밖으로/언제나 여행

by 황제코뿔소 2020. 2. 22.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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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우회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식받고 나서 한동안 1. 힘들어서 2.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기회만 되면 밖에 나가려고 하는 편이다. 숙주반응이 덜한 편이라 그럴만한 몸 상태인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방콕만큼이나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내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이식 전 항암을 받을 당시에도 무균실에서 나왔을 때마다 여행을 다녀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 모든 여행들은 솔방울과 함께 했고, 이번 청평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솔방울은 대학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만든 산행모임이다. 다시 봐도 이름이 참 마음에 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랑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속해있고 일전에 언급한 문학모임 산책(이름이 참 맘에 든다22)도 바로 여기서 파생된 모임이다. 대학에서 만난 이 사람들과 특별한 정도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이유의 큰 축은 바로 여행이다. 학생회, 소모임에서 만나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거나 여행 그 자체가 계기가 된 사람도 있다. 나의 과거를 구성하는 강렬한 기억들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그때 그 여행들에 대해서도 기회가 된다면 포스팅해보고 싶다. 

  아무튼 이번 여행은 솔방울 신년회를 빙자한 것이었지만 사실 내가 이식병동에 있느라 송년회에 오지 못했다고 따로 기획한 여행이었다. 본래 우리는 계절산행이라고 하여 1년에 2번 방학시즌에 지리산 혹은 설악산 종주를 해왔다. 멤버들이 하나둘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서 종주라는 형식은 사라져갔지만 특별한 산행 혹은 여행을 통해 모두가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고자 해왔다. 그런 맥락에서 1월 달에 한번 미뤄졌지만 결국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숙소 테라스에서 보이는 청평댐

 

  여행 지역으로 청평이 정해진 계기는 숙소 때문이었다. 본래 서울 근교로 갈 예정이었는데 멤버 중 한명 아버님이 구해주신 것이다. 숙소의 퀄리티가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선발(나, 펭귄, 내롬이, 민지)이었던 우리는 짐을 풀고 점심부터 먹었다. 메뉴는 청평이라는 지역과는 살짝 쌩뚱맞은 돈까스. 공용으로 시킨 비빔국수까지, 테이블에 나온 모든 음식을 남김없이 흡입했다. 관광객처럼 보이지 않는 손님들도 보이고 대기손님까지.. 진정 동네 맛집으로 잘 찾아간 듯 하다. 내롬이가 시킨 생선까스도 맛났다. 

 

아주 만족스러웠던 마루돈까스

 

  배를 채운 후 항상 선발의 몫이 될 수 밖에 없는 미션, 장보기를 clear. 서울 근교 놀러가서 장볼 땐 역시 하나로마트.. 음식제한이 있는 나도 최대한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신경써서 장을 보았다. 그리고 밤에 다같이 영화를 보기로 해서 그에 맞게 팝콘까지 get! 장 보고 나서는 디저트 타임을 위해 카페에 갔다. 사진도 찍고 수다도 떨다가 보드게임도 한판 하고 다시 숙소로 come back. 

 

선발의 숙명..

 

  이후 이어진 특별한거 1도 없는 일정. 우리 모임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유 넘치는 일정이었다. 민지와 나는 쿠키런을 같이 달렸다. 무균실에 있을 때 시작했는데 아기자기하고 모으는 컨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력있었다. 친구를 초대하면 보상을 주는 미션 때문에 민지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이 작년이었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민지도 쿠키런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 ㅋㅋㅋ 기본적으로는 개별적으로 플레이하는 게임이지만 두 명의 플레이어가 같이 달릴 수 있는 우정런도 존재한다. 우리는 그 우정런을 각자 다른 방에서 큰 소리로 서로에게 오더를 내리고, 원망하며 플레이했다. 서울에서부터 운전하느라 고생한 내롬이는 우리의 '사운드 플레이' 때문에 시끄럽다고 투덜투덜 ㅋㅋ

  그렇게 쉬다가 숙소 주변도 거닐다보니 후발멤버들이 하나둘 합류했다. 차를 한대밖에 빌리지 않아서 멤버들을 픽업하러 내롬이가 청평역으로 여러번 왔다갔다 해야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었다. 도현이가 합류하니까 확실히 오디오가 꽉꽉 차기 시작했다. 노무사 2년 차인 도현이는 우리 모임에서 분위기 메이커다. 설거지를 내기로 걸고 보드게임 아키올로지를 할 때도 머리보다는 입을 많이 썼다. 

 

설거지는 결국 민지가

 

  초딩 때 즐겨했던 부루마블이 내 인생의 첫 보드게임이었을 것이다. 이후 학부 시절 학생회실에서 가끔 뱅, 클루, 할리갈리를 하던 정도였다. 하지만 진단을 받고나서 상당히 깊이 보드게임에 심취하게 되었다. 2차 항암 때는 퇴원 바로 다음날 집앞에서 개최한 보드게임 페스타를 이틀 내내 갔었다( 호중구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 바글바글한 곳을 갔던 위험한 나들이..). 거기서 보드게임을 잔뜩 구입한 이후 보드게임은 우리 내에서 엄청난 유행을 탔다. 후배들이 그냥 놀러오거나 산책과 같은 모임이 있는 날에 우리 집은 보드게임 카페가 되었다. 보드게임은 내가 매 여행마다 챙겨야할 준비물이 되었다. 이번에 가져간 아키올로지. 이름 그대로 고고학 컨셉으로 다양한 보물을 수집, 교환해서 자신의 덱 점수를 최대한 높여야한다. 최대 5인용이며 선택한 유적에 따라 변형 플레이도 가능하다. 보드게임 관련해서도 추후 포스팅 예정!

  놀러와서 저녁메뉴로 고기가 빠질 수 없다. 각자 개인일정을 마치고 오느라 고생한 멤버들을 위해 내가 고기를 구웠다. 집에서 손 하나 까딱 안하다가 이렇게 나오면 솔선수범..이라기 보다 같이 놀러가면 내가 자주 굽는다. 목살은 그냥 굽고 삼겹살로 김치, 파채 좀 넣어서 구웠는데 모양도 맛도 나름 괜찮게 나왔다. 

 

 

  이 모임의 비쥬얼을 담당하는 연수가 합류했다. 그대로 분위기가 익어가면 좋으련만 연수의 합류는 당일치기로 온 펭귄이 서울로 돌아가야할 때임을 의미했다. 펭귄과 사귄 지 어느덧 6년차. 단둘이 여행을 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많지 않다. 펭귄을 태운 용산행 ITX 막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철도를 바라봤다. 이번 여행 계획 당시 시큰둥했던 펭귄도 부쩍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니 내 아쉬움이 더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그렇게 펭귄이 집으로 돌아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솔이와 지나가 청평역에 도착했다. 기다리고있던 나와 내롬이는 둘을 태우고 숙소로 돌아왔다. 

  갈 사람이 갔지만 올 사람은 다 온 상황. 본격적으로 술을 마실 시간이다. 특히 연수가 이번 여행을 위해 술을 준비해왔다.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 공식 건배주였다는 막걸리와 연수가 최근 출장차 다녀온 미얀마에서 사온 현지 보드카. 물론 나는 맛볼 수 없는.. 막걸리는 특히나 내가 좋아하던 술이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무조건이었다. 백혈병 진단을 받은지 어느새 1년이 다 되가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나나 애들이나 나의 금주가 아직 어색하다. 나를 위해 너도나도 맛을 설명해주던 장면을 회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결국 좋은 자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이번 여행 멤버가 문학모임 산책의 멤버와 동일하고 가장 최근 모임은 여행 3일 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할 말이 많다. 각자의 근황을 보다 자세히 전하고 모임에서 꺼내지 못했던 현재의 고민을 나눈다. 

  어느덧 2시가 되었다. 다음 일정인 심야영화 를 진행해야할 때. 낙오는 없다. 필참이다. 감상할 작품은 투표로 뽑힌 <그린북>.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역대 작품상 수상작 중 하나를 보는 것으로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을 기념하기로했다.

 

쇼파팀과 식탁팀으로 나뉘어 시청

 

  <그린북>은 이탈리아 이민자인 다혈질 토니와 천재 뮤지션 닥터 셜리의 우정을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셜리는 미국 남부 투어에 필요한 운전기사로 토니를 채용하고 자신과 너무나 다른 토니와 투닥거리기도 하지만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게 된다. 거기에는 셜리가 겪어야만하는 인종차별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 셜리는 '인정받는 흑인'이다. 능력, 연줄, 경제력 그리고 수트빨까지 대단한 셜리이지만 백인사회/흑인사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처지이다. 그에 비해 여유롭지 못한 경제적 상황으로 운전사 면접까지 봐야했던 토니는 가족이라는 든든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고용이라는 계약관계로 맺어진 상하관계는 셜리가 토니네 현관문에 들어서는 순간 수평적 우정으로 전환된다. 참고로 '그린북'은 1960년대 당시 흑인들이 미국을 여행할 때 참고한 유색인 전용 여행 책자이다. 

  4시가 조금 넘어서야 우리의 박수와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랐다. 자, 이제는 정말 자야한다! 화장실이 딸린 큰 안방을 여멤버들이 가져가고 남자들은 남은 방과 거실로 흩어졌다. 하루동안의 즐거움을 되뇌여 보기도 전에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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