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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봄] 4주차: 민주주의라는 믿음

Library/Club 창작과비평

by 펭펭's 코코 2021. 7. 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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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절망 그리고 위선. 이 모두 얼마나 우리가 사는 민주주의와 어울리는 단어들인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선거는 후보자가 필연적으로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약속까지 하게 만들고, 절망은 당선자에게 통치를 위임한 주권자들의 몫이다. 후보자이든 당선자이든 자신은 최대한 선이 되어야만 하는 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선은 가장되고 악이 상정된다. 하지만 본래 선악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결국 선거는 차악을 걸러내고 선택하는 절차에 불과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개념이고 믿음일 뿐이다. 그 믿음이 어떠한 모습으로 실재하는지는 각각의 환경과 역사에 따라 상이하다. 따라서 언론이 매일 퍼나르는 정계 주요 인사들의 언행, 정치권의 권력 투쟁과 행정부의 주요 정책들로는 해당 사회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 보다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이번 봄호의 특집, <미국 분열 이후의 세계, 어떻게 대응할까>는 그러한 관점이 녹아있는 글들이 수록되어 상당히 유익했다. 특히 이혜정의 “미국(美國), 미국(迷國), 미국(未國)”은 트럼프라는 미국체제의 산물을 미국사라는 맥락 속에서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인디언 부족들을 강제 이주시킨 미국의 7번째 대통령 앤드루 잭슨과 최초로 하원에서 탄핵 소추가 가결된 미국의 17번째 대통령 앤드루 존슨을 트럼프와 비교하는 대목은 인상 깊었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 자신의 집무실에 앤드류 잭슨 초상화를 걸었다. (사진출처: NY Times)


유독 이 글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다른 나라 이야기 같지 않은 부분 때문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에 대한 힐러리 클린턴의 인식은 내가 이번 보궐선거에서 2번을 찍은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인식과 유사하다. 클린턴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절반은 인종차별, 성차별, 외국인과 이슬람 혐오 등으로 똘똘 뭉친 ‘한심한 패배자 집단’(the deplorable)”로서 트럼프가 이들을 주류화한다고 몰아세웠다. 상당히 날을 세운 그녀의 발언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어 그녀는 “나머지 절반은 극단주의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로 이들은 정부와 기존 정당들 모두 자신의 현실적 문제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느낀다는 것”이라며, 이들이 출구 없는 현실에 절망하여 트럼프에게서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패배자 집단에 대한 그녀의 논평이 제도권의 엘리트 적폐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지만 나는 보통 사람들의 절망에 대한 지적만큼이나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라 생각한다.

힐러리 클린턴의 "Baskets of deplorables" 발언은 이후 논란과 밈을 일으켰다. (사진출처: Newswire)


물론 제도권 밖에서부터 정치인으로 부상하여 결국 “기존의 민주주의와 패권의 문법”마저 뭉개며 제도권을 헤집어 놓은 트럼프와 같은 존재를 국내 정치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전까지만 해도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로 제도권에 완전히 잡아 먹힌 안철수를 떠올려보라. 그럼에도 이 둘은 개인의 돋보임이 아니라 거대한 흐름을 타고 부상했다는 점에도 공통점을 갖는다. “트럼프의 정치적 부상과 몰락은 2008년 대침체 이후 미국체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병리 현상에 따른 것”처럼 말이다.

최선과 차악이 분리되지 않는 것은 미국만이 아니며, 극적인 정치적 경험을 토대로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운신의 폭이 좁디 좁은 것도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주권자들의 뜨거운 열망에 비해 이후의 변화는 너무나 미진하기만 하다. (사진출처: YTN)

인종주의, 제국-패권의 오만과 실패, 경제 위기 그리고 기후변화까지, 바이든이 직면한 과제들은 실로 엄중하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 사회에 산적한 문제들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다. 답답함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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