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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by 김영민

Library/book

by 펭펭's 코코 2020. 2. 3.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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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기

이 책은 「논어라는 고전에 대한 관심보다는 저자 때문에 읽게 된 책이다. 저자는 하버드에서 박사를 하고 현재 서울대에서 정치학 교수를 하고 있다. 나는 본 저자를 언급할 일이 있을 때 저러한 화려한 스펙보다는 ‘괴짜’라고 설명한다. 학부, 대학원 관계없이 존댓말로 수업을 진행하고, 교수들 자리라고 팍팍 티나게 준비해 놓은 프로포절(석박사 과정생들이 자신이 쓰고자 하는 학위논문의 골자를 설명하고 승인받는 자리)에서 굳이 학생들이 앉는 자리에 착석한다. 그 뿐이랴. 저명한 (명예)교수를 초빙한 강연에서는 강연자를 치켜세우는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날카로운 송곳을 전면에 내던지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학과 홈페이지에 교수진 목록에는 본인의 사진이 있어야 할 곳에 난해한 그림을 걸어놓았다. 그 그림을 클릭하면 저자의 화려한 이력 대신 개인 홈페이지 주소만이 홀연히 당신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다. 저자는 여느 교수들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느낀 저자의 특별함은 학자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세계가 굉장히 공고하다는 점이었고, 나는 그 세계가 궁금했다. 그래서 입학 첫 학기 때부터 저자의 수업을 수강할까도 싶었다. 길지도 않은 텍스트를 뇌가 얼얼해질 때까지 곱씹은 후에 합당한 논리와 근거로 자신의 생각을 추출(그런게 있다면) 혹은 만들어(그런게 없다면) 내야만 한다는 선배들의 후기는 나를 오히려 자극했다. 하지만 학부 때 교양수업을 듣는 것과 자신이 전공하고자 하는 분야와 무관한 대학원 수업을 듣는 것은 전혀 상이하다고 되뇌이며 그렇게 저자와는 말 한번 섞어보지 못하고 대학원을 졸업했다.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동시에 나도 아직 가보지 못한 맛집처럼 저자를 기억에 남겨둔 채..

이러한 나만의 '신비한 동물'은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책이 나왔다. 연재해오던 칼럼을 엮은 책이었지만 그 책을 위한 별도의 글과 자신의 영화 평론 글도 실려 있던 터라 나에겐 구매가치가 충분했다. 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리고 내가 제일 처음 마주한 감정은 좌절이었다. 내용과 양식의 측면에서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하게는 그 통통 튀는 해학과 은유 속에서도 정제하고 정제한 투명한 정종 한 잔을 내미는 그의 생각과 글은 단순히 연마를 통해 발휘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뒷맛이 다 가기도 전에 나는 중증환자가 되었고, 어느새 저자의 두 번째 책이 발간되었다.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주문.

#2 맛보기

“굳이 뭘 하지 않고도 다스림을 이룬 이는 순임금이로다. 무엇을 했는가? 자신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쪽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저자는 해당 구절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살피는 동시에 본 구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령이 행해진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행해진 것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논어가 행정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는 있지만 관료제의 적극적인 운용을 주장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는 저자의 주장. 그럼에도 많은 주석가들은 논어에서 관료제의 옹호 혹은 ‘강한 국가’의 근거를 찾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간극은 공자가 꿈꾸었던 국가보다는 후대의 해석자들이 꿈꾸었던 정치공동체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논어는 그렇게 수없이 많은 주석가들은 물론이고 비판자들에게 의해서도 생명이 끊임없이 연장되어왔다.

“매료된 이들은 텍스트를 남기고, 남겨진 텍스트는 상대를 불멸케 한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나쁜 사람들이 미워하는 경우만 못한 것이다.”: 모든 이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이들이 좋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나쁜 사람이 미워하는 것이 낫다. 이는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나 주는 입장에서나 정확하게좋아하고 미워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 정확함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정성에 대한 뛰어난 인식과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여된 지금 우리의 사회는 너무나 성급하고 부정확한 혐오와 애호로 돌아가고 있다.

#3 고전 나아가 책을 읽는 이유

본 책은 본문보다 맨 처음과 끝이 인상 깊었다. 저자는 ‘들어가며’, ‘에필로그’, ‘저자의 말’ 등의 일반적인 서문 표현 대신 ‘매니페스토’라는 표현과 함께 “생각의 시체를 묻으러 왔다”로 책을 시작한다. 그는 ‘동양’ 고전 읽기를 만병통치약으로 팔고 사는 것을 경계한다. 대신 생각의 무덤인 텍스트text를 텍스트가 묻혀있는 콘텍스트context 속에서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요청한다. 무턱대고 살아있는 고전의 지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고전의 지혜가 살아있게 된다면 그것은 텍스트를 공들여 읽고 생각한 독자 덕분이라는 것이다. 언어적 장벽만 고려해 봐도 내가 논어를 읽을 일은 없다. 하지만 저자의 메시지가 정녕 ‘동양’ 그리고 ‘고전’에만 국한된 것인가? 나아가 책을 읽는 이유 그리고 지금(2020.01.10) 여기(은마) 우리(산책-솔방울의 분파)가 이렇게 모여 있는 것도 같은 맥락 아닐까. 세상을 그리고 너를 알아간다는 것, 공을 들여야만 한다. 그럴 수 있기를 나도 간신히 희망한다.

p.s. 논어에세이라는 부제를 보는 순간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가 떠올랐다. 본 책을 읽는다고 학부 때 꾸역꾸역 읽었던 「강의」를 굳이 다시 손대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 부분 때문에 「강의」의 논어 편을 펼쳤고, 결국 책 전체를 다시 한번 훑었다. 아는 맛이기에 맛보려하지 않았지만 결국 아는 맛이기에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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