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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균실과 슬리퍼 (feat.크록스)

Diary/투병일기(AML)

by 황제코뿔소 2020. 3. 23.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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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를 원래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백혈병을 진단받은 이후로 슬리퍼와 상당히 친해졌다.

  병원 생활을 오래해야하는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백혈병 환자들은 무균실에 있는 동안 자신만의 슬리퍼를 착용한다. 보통 이식 전 항암을 3번에 걸쳐 하기 때문에 무균실에서 보내는 시간만 4달 가까이 된다. 이후 이식병동에서 1달까지 더하면 꽤나 오랜 시간 슬리퍼를 착용해야한다. 외래 진료에까지도 슬리퍼를 착용하고 온 환자들이 많다. 

  무균실에 맨 처음 들어갈 때 집에서 사용하던 슬리퍼를 그냥 가져오지 말고 왠만하면 새거를 구입해 오라는 안내를 받는다. 그리고 삼선슬리퍼처럼 앞이 뚫린 슬리퍼가 아니라 발가락이 보호되는 슬리퍼를 사용할 것을 권고받는다. 그래서 무균실의 많은 환자들이 크록스 슬리퍼를 신는다. 나도 그랬다. 성모병원 바로 앞에 위치한 강남 신세계 백화점에 크록스 매장이 있기에 거기서 구입했다.

  보다시피 상당한 치장이 가미되었다. 펭펭이가 면회를 올 때마다 지비츠라는 크록스 악세사리를 2개씩 가져와서 끼워주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저거보다 훨씬 더 많이 받았는데 기분에 따라 교체된 지비츠가 많다. 무엇보다 자리가 부족하다. 내게는 벅찬 펭펭이의 넘치는 사랑과도 같달까 에헴.

이것도 그나마 추린거다..ㅋㅋ

  종종 복도에서 나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데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경우가 있었다. 다 슬리퍼로 나를 알아본 것이었다. 무균실 병동에서는 자신의 병실을 나오면 무조건 낙상방지 헬멧과 마스크를 착용해야해서 얼굴이 다 가려지기 때문에 상대방을 알아보기 힘들다. 

  강남성모병원 혈액내과 무균실은 1인실과 5인실로 이루어져 있다. 감염 바이러스에 노출된 환자와 같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5인실을 이용한다. 들어와있는 시기가 각자 다 다르기 때문에 같은 방 환자들이 교체되어 최소 한 싸이클을 돌게 된다. 자신의 자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병상의 환자가 바뀐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동종 환자들을 만나게 된다. 항암 진도가 비슷할 경우 한번 이상 무균실 병동에서 같이 지낼 확률도 있다. 나는 2차 항암 때 같은 방을 지냈던 삼촌이랑 이식병동에서 다시 만났고 골수이식도 같은 날 받았다. 그분은 나처럼 급성골수성이 아니라 급성림프성이었다. 호쾌한 삼촌이셨는데 잘지내고 계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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