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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봄] 4주차: ‘거대한 전환’은 가능할 것인가?

Library/Club 창작과비평

by 황제코뿔소 2020. 4. 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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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과 비평2020년 봄호의 특집은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이다. 나는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무지하다. 국내에서 한때 주요 현안이었던 4대강 사업이나 신고리 5·6호기 건설에 관해서도 정치적인 이슈로 받아들이는데 불과했다. 범세계적 차원에서의 생태정치와 기후변화로 문제의 범위를 넓히면 나의 무지는 더 커진다. 대부분의 20, 30대가 나와 유사하지 않을까 감히 예상해본다. 나의 체감 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환경담론이 주요하게 자리 잡은 적이 없다. 그렇기에 이번 특집의 내용이 내게는 생소했지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본다.

  우선 기후위기 해결, 어디에서 시작할까에서 백영경기후위기와 관련된 담론들을 소개하고 토착민의 투쟁에 초점을 맞추어 생태전환의 관점을 조명하고 있다. 지구의 전체 역사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기간 동안 현생인류가 지구에 비가역적인 흔적을 남겼음을, 지구생태계가 마주한 재난적인 상황에 인간의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는 인류세(Anthropocene) 담론과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책임져야 할 주체가 호모사피엔스 종 전체가 아님을 강조하는 자본세(Capitalocene) 담론 모두 새로이 알게 된 개념들이었다. 앞선 개념들이 생소한 입장에서 인류세에 또 다른 접근으로서 투쟁 주체로서의 토착민에 관한 논의는 더더욱 그랬다.

  백영경은 글 말미에 기후위기처럼 원인과 해법이 복잡한 문제일수록 그것을 둘러싼 담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모두에게 결코 똑같이 경험되지 않는다는 기후위기의 특성은 담론이라는 형식에 내재된 추상성을 더욱 증폭시킨다. 담론은 그 주체가 확장되어야만 힘이 생긴다. 그 대상이 인류 전체에게 공통된 사안임을 인식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기후위기이기에 이 담론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은 그리 강하지 않다. 또한 저자가 지적하듯이 원인과 해법들이 다층위적인 사안이기에 파생되는 담론 또한 무수할 것이다.

  그러나 담론에 머무르는 담론은 무용하다. 현실적인 용도가 있느냐의 여부가 그 담론의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순 없겠지만 중요한 담론은 대부분 현실적인 요구를 토대로 생산과 재생산을 거듭해간다. 한국 사회에서의 페미니즘처럼 말이다.

  담론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도, 저자를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분명히 사회구조를 변혁하는 정치를 통해 정책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차원도 필요할 것이라고 문제의 복합성을 상기시킨다. 게다가 자신의 땅에 발붙이고 뿌리를 내려온 토착민들을 환경투쟁의 한 주체로서 조명함으로써 제대로 된 담론과 그 이상을 뚜렷하게 주문하고 있다.

  되려 나의 입장은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에서 백무산, 허수경, 김혜순의 시를 저항이라는 테마로 풀어내고 있는 나희덕과 배치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는 정치를 통해야한다는 입장을 정치권력이나 주류세력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현상 유지에 기여할 공산이 커 보인다고 언급한다. 유일한 대응방식은 집단적인 방식, 즉 정치를 통하는 것이라는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의 주장의 의미를 그리 쉽게 폄하해도 정말 괜찮은지 묻고 싶다. 정치의 의미를 좁게 공적권력을 두고 펼치는 의회정치로 국한해도 그렇다.

  그린뉴딜 개념의 다양한 계보와 성향을 설명하는 그린뉴딜 다시 쓰기: 녹생성장을 넘어는 이러한 의문을 가중시킨다. 저자 김상현은 미국의 정치권력 속에서도 그린뉴딜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동시에 착취적·추출적 성장 중심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로부터 포스트-성장, 탈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전환기적 전략으로서의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도입부에서 언급한 민주당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트레즈(Alexandria Ocasio-Cortez)의 그린뉴딜 결의안도 많은 의원들의 참여를 위해 그 내용이 온건하게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탈탄소화 과정이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을 통해 정의와 형평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있다는 차원에서 기후정의운동의 관점을 반영하고자 했다. 정치는 분명 투쟁일수만은 없기에 타협의 과정 속에서 목표하는 바가 깎여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를 통하지 않는 실질적인 변화가 있는가? 나희덕은 자본세에 저항함에 있어서 언어가 가장 무력한,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난해한 말을 하고 있다. 이보다는 김상현이 말하는 것처럼 정치권력에게 어떠한 그린뉴딜인가를 묻는 것이 보다 실질적이지 않겠는가?

  저자 나희덕에 대한 나의 불만을 조금 더 이야기해야겠다. 우선, 국지적 양상을 띠지 않는 예로서 코로나바이러스를 언급하다가 불현듯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부분(p.67)은 앞뒤 내용 연결에 있어서 매끄럽지 않다. 더 중요하게는 그는 글의 제목에 인류세대신 자본세를 쓴 이유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입장을 빌려 설명한다. “인류세라는 말에는 지구를 파괴한 것도 인간이지만, 그것을 해결할 주체 역시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묻고 싶다. 철학적 사유와 개념적 논의를 벗어나서 말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야기한 문제를 해결할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저자는 이어서 개량화, 관료화의 위험과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언급한다. 혁명적인 정치경제체제의 전환이 부재한 현재로서 과연 기존의 시스템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담론과 대책이 가능할까?

  담론에 그치지 않고 개량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정치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와 해결해 나가야한다는 나의 주장은 김상현의 글에 의존하여 그 근거를 겨우 확보하고 있다. 근거의 빈약함 외에도 기후위기라는 일국을 벗어나는 문제를 조정할 정치권력이 부재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집단행동의 딜레마에 가장 적나라하게 노출된 인류 활동이 바로 정치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보라. 미국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마스크를 틀어쥐는 조치를 취하였고, 전 세계적으로 마스크를 포함한 의료장비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프랑스의 한 지방정부가 중국에 주문한 마스크 수백만장은 웃돈을 부른 미국의 수입업자들에게 넘어갔다. 중국 공장에서 생산되어 독일로 가던 20만개의 마스크는 경유지 태국에서 행선지가 불현듯 미국으로 바뀌는 일이 벌어져, 독일 정부는 이를 현대판 해적행위로 규정하고 미국 정부에 국제 규칙 준수를 촉구했다. 이렇듯 우리 인류가 영위하는 삶에 기본적인 공동체 단위가 국가인 이상 집단적인 방식으로, “정치를 통하는방식으로 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https://www.change.org/p/united-nations-call-for-the-resignation-of-tedros-adhanom-ghebreyesus-who-director-general

  공통의 문제 앞에서 국제기구라는 초국가적인 정치체 또한 근본적으로 얼마나 무력한지를 WHO(World Health Organization: 세계보건기구)가 잘 보여준다.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이 이끄는 WHO는 이번 코로나 사태 초기부터 안일하고 무능하게 대처해왔다. 중국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피해오던 사무총장은 128일 베이징에서 시진핑과 독대한 이후에는 "중국의 대처를 칭찬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중국 감싸기'WHO 사무총장 취임 배경과 관련있다. 사무총장 선거전에서 그는 '중국 정부의 9억 달러(1조원) 투자'라는 엄청난 지원으로 아프리카표를 싹쓸이하면서 당선될 수 있었다.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이 중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중국의 차관이 가장 많이 투입된 국가 중 한 곳인 에티오피아 출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무총장 개인이 아니라 회원국들의 분담금으로 운영되는 국제기구 자체에 내재한다. 일본 정부의 1천만 달러 후원과 물밑 요구로 일본 크루즈선의 확진자 수가 일본 통계가 아니라 별도로 분류했으며 브리핑에서 우려국으로 발표되다가 갑자기 누락되었다. ‘을 많이 내는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로 돌아오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도입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비록 무지하지만 결코 무감각하진 않았다. 나를 끊임없이 환기하는 주변의 실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입 대고 마시게끔 제작된 플라스틱 커피컵 뚜껑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던 몇 년 전, 텀블러를 두고 왔다며 빨대는 물론이고 뚜껑을 처음부터 받지않고 마시던 가까운 후배(한솔이!)의 모습이 나에겐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난 불필요한 플라스틱 사용을 의식적으로 자제해왔다. 무균실에서 항암을 하던 때에도 재활용할 수 있는 물품들은 쉬이 버리지 않고 보호자가 가져가도록 하곤 했었다. 물론 이번 호 특집에 실린 플라스틱 중독 시대 탈출하기탈성장에 근거한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개인을 훨씬 웃도는 차원에서 논의하고 있지만 말이다. 일반쓰레기로 버려진 알약들이 환경을 파괴한다며 일일이 모아 동네약국에 가져가 폐기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커피 한잔을 마실 때마다 매번 플라스틱 쓰레기가 배출된다는 이유로 캡슐커피머신을 중고판매나 나눔이 아닌 처분하는 블로그 이웃(네이프리님!)의 포스팅은 내게 묻는다. 본인의 일상이 생태 및 환경과 동떨어져 있다면 그 무수한 담론이 무슨 소용 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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