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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여름] 3주차: 두 모녀와 모자의 여행

Library/Club 창작과비평

by 황제코뿔소 2020. 7. 3.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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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일을 쉬고 있는 상황을 오히려 기회삼아 여행을 다녀오자고 딸 채운이 제안할 때 엄마 반희가 거절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불쑥 들었다. 나의 엄마는 당신의 안락함이 항상 후순위이며 자식-부모 관계 내에서 대부분의 ‘엄마’들이 더더욱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희는 역시나 딸의 여행 제안에 주저한다. 주저하는 바로 그 틈을 파고 들어야 한다! 빠른 말로 이번 여행을 꼭 가야하는 이유와 부담되지 않는 이유를 어필해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지못했던 반희가 다음 장면에서 양 손 가득 싸 온 짐을 들고 채운을 기다리고 있을 때, 바로 둘의 오붓한 여행이 시작될 때 나는 설렘이 느껴졌다. 내가 엄마와 떠나기로 한 여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1차 항암을 할 당시였을 것이다. 엄마와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함께 걷기로 약속을 했을 때가. 자연과 트레킹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내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이후 더욱 신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신 엄마로서도 함께하기 너무나 좋은 여행이다. 내년 초중반 즈음 엄마가 2주 남짓의 안식휴가를 받으시면 그때 떠나면 딱이다. 모든 것이 완벽해보이는 계획! 벌써 1년이 넘게 지났다. 3차에 걸친 항암과 이식을 거쳐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꾸준한 관리를 필요로 하며 사실상 완치가 없는 병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치의의 설명을 상기하면 사실 아득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가 서로의 내밀한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계기를 모녀에게 제공해주었듯이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쯤 미국에 있었을 테고 엄마와의 여행이 약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모녀의 경우 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소설에서 뜻 깊은 여행은 현재완료이지만, 괜찮다. 나는 반드시 이겨낼 것이고 내가 엄마와 순례자의 길을 함께 걸을 때는 우리 모자 중에서도 환자는 없을 것이며 여행도 더 이상 미래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 될 테니까.

반희는 이 순간을 영원히 움켜쥐려는 듯 주먹을 꼭 쥐었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일러주려는 듯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채운씨가 오고 있어. 채운씨가 와.

“반희가 자신을 ‘엄마’라고 칭하지 않고 채운을 ‘딸’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채운에 대한 반희의 살핌이라는 소설 초반 대목에서 두 모녀의 순탄하지만은 가정사를 예상할 수 있다. 반희는 채운이 고2때 남편과 이혼하고 집을 나와 이후로 쭉 혼자 지내왔다. 채운에겐 오빠가 있음에도 반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채운뿐인 것으로 보인다. 더 기구한 사연의 가정사야 훨씬 더 많겠지만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은 자식과 부모로서 채운과 반희가 보이는 상처에 대한 태도이다. 반희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식들을 떠난 선택이 이기적이라 생각하고 평생을 죄책감 느껴 온 것 같다. 반희가 이혼을 결심하게 된 맥락이 소설에서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아무리 반희가 이혼할만한 배경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무관하게 자식에게 만큼은 미안함 뿐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지속적으로 이으려고 노력하는 채운과는 반대로 모든 고리를 끊으려 했던 것이고. 하지만 결국 반희도 본인 마음가는대로 처신한 것이다. 엄마로서 자신을 본받지 말았으면 하는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상처를 미안함으로 다스리려했다.

서로를 위하고 한없이 아끼지만 결국 본인의 감정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아프고 나서 절감했다. 하루아침에 백혈병 진단을 받은 이후 엄마와 나의 관계는 본래보다 더 각별해졌다. 엄마에게 골수를 이식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족 중 보호자 역할을 엄마가 오롯이 도맡으면서 원래부터 정작 본인은 없고 가족들뿐이었던 엄마의 삶엔 나만이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신보다 나의 행복이 우선시되는 그 진심에만 헌신하는 것은 결국 내가 아니라 본인을 위한 것이라는 그 말은 차갑디 차갑고 싸가지 없지만 그 또한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 나의 진심인 이 아이러니.

소설 속 1박 2일 여행으로 두 모녀의 상처가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자식-부모 간의 간극은 본래 완전히 좁혀질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누군가는 그럴 필요도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그러고 싶은 존재가 있다. 순례자의 길을 엄마와 함께 걷는 그 시간이, 그 여행이 너무나 기다려진다.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 단편선 <실버들 천만사>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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