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 진단 이후 내가 바라는 것은 딱 하나였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다시 평범한 삶 속으로 돌아가는 것.
기나긴 터널을 조금은 빠져나오게 된 지금, 나에게도 일상이 생겼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일상이지만 본래부터 '일상'은 정해진 장소보다는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공간에 가깝기에, '나의 일상'을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더욱 값진 점은 평범함을 대하는 나의 달라진 태도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무언가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찾았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여겼던 그 때의 강박을 나는 기억한다.
지금은 주로 편안함에서 행복을 '느낀다'. 무탈함이 곧 행복이라니, 얼마나 따분한가. 그러나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은 맛있기만 하다.
그리고 정말로 별일 없는 것이 행복인 것 같다. 별일을 겪고 난 이후의 내 행복관이다. 행복이든 무엇이든, 평범하지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평범해서 소중한지도 모르겠다.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 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 <행복>, 나태주
최근 행복을 가장 또렷하고 확실하게 느끼는 순간은 공원을 산책할 때이다. 누구는 열심히, 누구는 느긋하게 운동한다. 마냥 신이 난 반려동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주말에는 연인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 평범한 순간 속에서 나 또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노라면 편안함을 느낀다. 행복을 느낀다. 집 앞 놀이터에서 나는 아이들 소리나 간간이 들리는 지하철 소리가 싫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동네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봄. 공원은 처음 방문했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3월의 공원은 개나리가 주인공이다.
허술하고 허술한
개나리 울타리
일 년 내내 그저 푸른빛
잡목처럼 어둑하게 웅크려있다가
봄 되어서야 제일 먼저
노랑 등불 조그만 종꽃부리
꽃을 피워서 하늘을 다 비치고 있다
- <너를 만나는 날>, 나태주
4월의 보라매공원은 더 화려하다.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느긋하게 걷고 있으면 참 좋다.
꽃 냄새도, 풀 냄새도 맡을 수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좋다.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두 눈 감고 날아가
두 팔 벌려 하늘 보며
내겐 소중한 너를 부르네
햇살이 참 좋다 네가 있어 참 좋다
언제나 내 곁에서
따스한 미소 짓는 네가 고맙다
햇살이 참 좋다
네가 있어 참 좋다
네가 있어 참 좋다
- <참 좋다> 중, 양희은
가끔은 시상이 떠오를 정도로 삘이 차오른다. 길지 않더라도 느낌있는 시를 하나 뽑아내고 싶지만 매번 쉽지 않다. 시를 쓰는데 그 시간을 쓰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인지, 결국엔 엉뚱한 생각들로 끝이 난다.
아이들이 날리는 연에서 영화 <Psycho>에 나오는 박제된 새를, 짜파게티 광고판이 있는 농심 건물에서 초코맛 프로틴 바를 떠올릴 뿐이다. 밝고 동그란 가로등이 하늘에 보이는 발톱 모양 초승달 모양이면 어떨지 생각하고 지나칠 뿐이다.
하지만 시를 잠깐 머금은 그 시간은 전혀 시시하지 않다.
Medicine, law, business, enginnering.
These are noble pursuits and necessary to sustain life.
But poetry, beauty, romance, love.
These are what we stay alive for.
- <죽은 시인들의 사회> 중
무엇보다 내가 도달한 시간들이 행복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함께 한 사람들 덕분이다.
+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 <봄의 정원으로 오라>, 잘랄루딘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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