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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드라마 ② : 뿌리깊은 나무

Theatre/series

by 황제코뿔소 2020. 7. 30.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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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 이어 나의 인생드라마를 소개하려 한다.

# 2위- 뿌리깊은 나무

이 드라마는 훈민정음 창제를 내용의 골자로 하고 있다. 이정명의 소설 『뿌리깊은 나무』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본 제목은 용비어천가 2장의 첫 구절인 ‘불휘기픈남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원작을 직접 읽어보지 않았지만 주요 인물들의 이름 정도만 같을 뿐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소설에서는 세종이 주역이 아니라고 한다. <뿌리깊은 나무>에선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 ‘이도’가 단연 주인공이다.

 

실존인물, 그것도 세종대왕이 주인공이고, 한글창제가 주제인 사극이라면 역사적 고증에 관한 이야기가 반드시 뒤따르게 되어 있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개봉 전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요즘에는 사극 앞에 ‘퓨전’, ‘판타지’ 등을 붙인 장르가 흔해졌다는 점을 제쳐두더라도 얼마나 정밀하게 고증을 했는지 정도는 감독 및 작가의 제작 의도에 따라 다른 것뿐이지 작품성을 결정하는 주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영화든 드라마든, 작품이 토대로 하는 역사에 얼마나 부합하느냐가 감동과 재미를 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이 평단과 대중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봉테일’이라서가 아니고, 송강호라는 대배우를 앞세웠음에도 <나랏말싸미>가 망한 것이 고증 때문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역사 자체가 죽은 돌 혹은 딱딱한 문자가 아니다. 해석의 여지가 분명 있다. <뿌리깊은 나무>도 ‘역사를 문학적, 예술적 상상력을 가미한 창작의 재료로 활용했구나’ 정도로 여기면 될 듯싶다. 극 중에서 중요한 축으로 등장하는 ‘밀본’부터가 허구다.

 

역대급 명대사 "지랄하고, 자빠졌네" 장면

 

<뿌리깊은 나무>은 천지계원과 밀본 간의 대결 구도로 전개된다. 천지계원은 세종이 한글 창제를 위해 만든 비밀 조직이고, 밀본은 조선을 ‘재상이 뿌리가 되는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비밀 조직이다. 등장인물들이 크게 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지만 각각의 구성원들은 그 배경과 구체적인 이해관계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지점 외에도 두 세력 간의 대결 구도 속에 녹아든 드라마적인 요소는 여럿 있다. 우선, 천지계원은 모두 이도의 신하들이지만 이들은 서로가 누군지 모르며 목적이 비밀리에 부쳐져있고, 밀본은 존재 자체가 역모이기 때문에 구성원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맡은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밀본의 3대 본원 정기준이 누구인지는 일종의 반전이다.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반포하려는 세력과 그것을 반드시 막고자 하는 세력 간의 대결, 이 단순해 보이는 구도 속에서 흥미를 끌어내는 다양한 요소들이 이미 녹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두 세력의 대립이 사상과 이념의 충돌이며, 대결의 주된 형태가 살육이 아닌 설전이라는 점이 <뿌리깊은 나무>의 커다란 매력이다. 이것은 토론으로 뜻을 세우겠다는 세종 이도가 걷고자 한 길인 동시에 왕권 강화를 위해 살육을 서슴지 않았던 자신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걸었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기도 했다. 이도와 밀본 간의 이념 대립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양측의 입장 모두가 그럴 듯해야하는데, 팽팽하다. 정체가 밝혀진 본원(정기준)이 이도와 펼치는 백성(국민)과 권력에 대한 토론은 그 깊이가 상당하다. 가히 명장면이다.

 

 

해당 장면의 대사를 발췌해서 조금 소개하고자 한다. 세종은 먼저 새로운 글자가 밀본이 떠받드는 삼봉 정도전이 추구한 성리학적 이상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후 새로운 글자를 반대하는 이유가 결국 사대부들의 기득권 때문이 아니냐고 묻는 세종에게 정기준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질서, 조화, 균형이라고 발끈한다. 이에 세종이 답한다.

세종: 너희 사대부들은 결국 부패하게 될 것이다. 사대부는 그들의 능력만큼 욕망을 갖게될 것이고 또한 기득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득권을 세습하게 될 것이다. ? 사람이니까.

아무리 뛰어난 한 개인도 자신이 속한 시대의 관념을 온전히 벗어날 순 없다. 신분질서를 전제로 백성과의 권력 공유를 거부하는 근거로 질서, 조화, 균형 따위를 들먹이는 정기준의 논리는 빈약해 보인다. 말장난이고 모순이다. 하지만 세종은 슬슬 흔들린다.

세종: 그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뽑는다 그것이 니가 말하는 지옥이냐?
정기준: 이도! 동서고금에 그런 무책임한 제도가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정치는 책임이다. 유사이례 정치의 본질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어. 정치는 오직 책임이야. 헌데 그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뽑는다? 허면 그 지도자가 실정을 한다면 누가 책임져야 하는 건가? 그 지도자를 뽑은 백성을 모두 죽여야 하나?

 

사실 이 이미지 자체가 스포가 될 수 있다

 

새로운 글자는 백성들의 욕망을 일깨울 것이고 그 욕망은 결국 정치를 향하게 되어 있다며 이는 그러한 정치체제 속에서는 절대 책임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정기준의 주장이다. ‘역사의 종언(종말)’으로도 유명한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정치질서의 기원』(저자의 주장에 대한 동의를 떠나서 입문자들에게도 추천하는 책)에서 근대 정치 질서의 3요소로 강한국가, 법치주의, 책임성을 꼽은 바 있다. 책임성(accountability)에 대한 정기준의 강조가 마냥 소수의 지배층을 합리화하는 논리만은 아닌 것이다. 정기준은 이 부분을 파고든다.

정기준: 주상의 진심을 말해볼까? 백성과 권력을 나누려 한다? 그리 말했느냐? 아니다. 주상의 속마음은 책임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권력을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나누려는 것이 아닌가...역병이 생기면 힘이 닿든 닿지 않든 그 한명 한명을 찾아가 약을 먹일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위정자가 해야 할 일이다. 글을 만들어 글자를 배우게 하고 글을 아니 이제부터 스스로 구원하라, 이것이 임금의 태도인가? 백성은 오직 보살피고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다. 진짜 주상의 본심을 하나 더 이야기 해주랴? 너는 이제 백성이 귀찮은 것이다.

정치학 전공 새내기가 전공 수업 때 반드시 한번쯤 듣게 되는 질문. 정치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그리 와 닿지 않는 근원적인 질문들이 무의미할 때도 많지만 고민과 사유의 좋은 시작이 되기도 한다. 정치(政治)를 정의하라. 데이비드 이스턴의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가 거의 교과서적으로 소개되곤 한다. 한자를 그대로 풀면, ‘바르게 다스리다.’ ‘다스리다’라는 술어가 담고 있는 권력의 주체와 방향은 세종과 정기준의 시대 속에서 이해해야한다. 중요한 부분은 가치의 판단이 개입되는 ‘바르게’이다. 세종과 정기준의 논쟁에서는 이 부분이 빠져있다.(뭐.. 시사 프로그램이 아니니까..)

 

 

극중에서 세종 이도가 자신의 길을 설득하고자 한 캐릭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장혁이 연기한 강채윤, 한짓골 똘복이다. 똘복이 중요한 이유는 뛰어난 무공 때문도 아니고 명석함 때문도 아니다. 바로 극 중에서는 세종이 설득해야할 백성들의 표본으로서의 역할을, 시청자들에겐 유의미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똘복은 한자를 읽지 못하면서 아는 체한 소이(신세경 분)로 인해 이 세상 전부였던 자신의 아버지를 잃게 된다. 똘복의 아버지는 같이 누명을 쓴 대감의 도움으로 유서를 남긴다. 그런 똘복이 세종에게 말한다. 백성들이 글자 배워서 뭐하겠냐고. 뼈 빠지게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데 그거 배울 시간이 어디 있냐고. 나아가 소리친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가며 남긴 유서가 “글자를 배워서 대감마님 잘 모셔라”라면, 쓸 수 있는 글자로 쓰는 말이 고작 그거라면 그놈의 글자가 무슨 소용이냐고. 이는 정의로운 선구자로 쉽게 간주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경계이자 계몽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는 낭만에 대한 일갈이다.

 

백성을 아끼고자 하는 진정성과 뛰어난 혜안을 선보이는 세종을 한석규가 연기한다면 “너의 조선은 어떤 조선이냐?” 태종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아직은 유약하고 어린 세종은 송중기가 연기한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석규의 연기는 말 그대로 미쳤지만 송중기의 연기 또한 훌륭하다. 자신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준비하는, 그런 캐릭터를 아주 잘 표현했다. 태종과 대립하는 장면은 송중기 버전의 세종에게도, 호위무사 무휼에게도 가히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뿌리깊은 나무>에서 액션의 요소가 아예 배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방지, 무휼, 카르페이 등 매력적인 무사 캐릭터들이 나와서 무협의 느낌을 더함으로써 액션을 비주얼 측면에서나 서사적으로나 적절히 활용한다. 탁월한 캐스팅도 한 몫했다.

 

 

끝으로 <뿌리깊은 나무>는 엔딩이 참 인상 깊다. 허구의 인물들은 마지막 화를 중점적으로 모두 죽는다. 그리고 실존 인물인 세종은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홀로 남아 “계속 나의 일을 했다”고 읊조린다. 캐릭터들의 생사와 극의 끝맺음이 절묘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그 어느 드라마보다 기억에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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