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인생드라마가 있을 것이다.
국내 작품들로 한정한 나의 인생드라마 TOP5는 다음과 같다.
내가 중학생 때였다. 나도 당시의 많은 학생들처럼 대형관광버스가 몇 대나 동원되는 종합학원에 다녔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학생들이 우글거리는 버스 안은 이 드라마가 방영되던 요일이면 조용했다. 버스 앞좌석 쪽에 설치된 TV로 <야인시대>를 조금이라도 보기 위함이었다.
"내가 고자라니ㅠㅠ"에서부터 최근에는 "사딸라!"까지 야인시대는 살짝 패러디의 대상으로만 언급이 되지만 당시 <야인시대>의 인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바람처럼 스쳐가는 정열과 낭만아~"로 시작하는 ost(강성-<야인>)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최고 시청률은 57%까지도 찍었다고 한다. 특히 아직 철들지 않은 남자 학생들에겐 '남자들의 주먹 세계'가 풍기는 매력이 있었다.
주인공인 김두한을 연기하는 배우가 안재모에서 김영철로 바뀐 이후의 스토리는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대하드라마인 만큼 1년이 넘게 방영되었고,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이니 세세하게 기억 못하는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김영철로 바뀌고나서 시청률은 반토막 났다고 한다. 하지만 청년기 김두한 외에도 기억에 남는 캐릭터들이 정말 많다. 쌍칼, 하야시, 구마적, 신마적 그리고 무엇보다 시라소니 형님! 개코와 마루오까도 기억에 남는다.
그 어린 시절에 <야인시대>를 통해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어렴풋이 접했다는 점도 인생드라마로 꼽는 이유 중 하나이다. 역사를 직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었던 어릴 적 대하드라마는 <태조 왕건>, <대조영> 등 많이 있었지만 워낙 오래 전 시기를 다뤄서 그런지 실감이 상대적으로 덜 났던 것 같다. 그에 반해 <야인시대>는 내가 멋모르던 나이였음에도 드라마에 녹아져있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의 위태롭고 어지러웠던 역사가 와 닿았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 것은 김두한과 형제처럼 지내던 정진영이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면서 김두한과 정반대의 노선을 걷게 되면서 정면으로 부딪히다가 결국 오랜 친구의 손에 피살당한다. 얼마나 철저하게 고증이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이념투쟁이라는 거시적인 시대적 흐름 속에 휩쓸린 개인들의 미시적인 비극을 꽤나 성공적으로 표현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올인이라는 단어를 이 드라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2003년 방영된 드라마이기에 이 때도 난 어렸다. 카지노와 도박이라는 소재가 생소했지만 주로 이병헌과 송혜교의 사랑이 참 애뜻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 애뜻함에는 주인공들의 비주얼에 큰 공이 있겠지만 초대형 스케일도 하나의 요소였다. 드라마에서는 제주도의 섭지코지와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 라스베이거스 일대 등이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지금이야 국내 드라마의 해외 로케이션이 흔하디 흔하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먼 거리를 두고, 상실과 오해가 반복되는 상황에서도 서로가 결국에 이어지는 운명같은 이야기가 어린 나에게는 인상 깊었나보다.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아들은 인하, 딸은 수연이라고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을 정도로 <올인>을 좋아했었다.
작년에 유튜브 SBS Catch 채널에서 요약본을 올려줘서 한창 재밋게 다시 봤었다. 재치있는 자막이 또 다른 꿀잼 포인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9Iwmz9BKN2g
<올인>은 삽입된 곡들도 참으로 좋다. 시작 반주부터 끝내주는 박용하의 <처음 그 날 처럼>도 좋지만 나는 김형석의 <All In Theme>이라는 곡을 더 좋아한다. 요새도 자주 듣는다.
참고로 <올인>은 최완규 작가의 카지노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데 그는 사기, 도박 혐의로 기소 당한 바 있다. 2부, 3부에 해당하는 <태양을 삼켜라>와 <트라이앵글>은 망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이수연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인 <라이프>는 병원이 주된 배경이고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의사이지만 기존의 '의학드라마'들과는 다르다. <라이프>는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하는 생명을 다루는 병원이라는 공간에 스며들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돈'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음은 틀림없다. 우리는 현실에서 그 논리가 침투되는 어떠한 영역이든 지키려는 누군가와 바꾸려는 누군가를 목도한다. <라이프>는 그 점을 아주 흥미롭게 그려낸다.
명작들은 큼지막한 주제 속에서도 등장인물들 개개인의 관계 속에서 마음을 찌르고 공감되는 대목이 있다. 이동욱이 연기한 예진우 캐릭터와 자신으로 인해 휠체어 신세가 된 동생과의 관계가 내겐 그랬다. 이동욱은 <라이프>에서도 연기 논란이 일었는데 내겐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구승효를 연기한 배우 조승우에게 너무 홀딱 반해서 그런 거슬림은 미미하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이 드라마만큼은 조승우가 처음과 끝이다. 이분법적으로 얘기하자면, 방식과 허용치가 다를 뿐 대부분의 상국대병원의 의사들이 지키려는 자로, 자본을 대표하는 재벌 2세 기업 총수가 바꾸려는 자로 묘사된다. 이 둘을 거칠게 선과 악으로 구분한다면 구승효는 그 가운데에 있다. 구승효는 분명 자본에 의해 고용되었고 자본 쪽에 더 가까이 서있다. 총수의 이익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한다. 하지만 선이 있다. 지키려는 자들과 부딪히지만 '자본의 효율성은 정말 악인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끌어낸다.
또한 자신의 사익보다 공익적인 가치가 절대 우선시되진 않지만 총수에게 자신의 업무 수행의 대가로 병원을 조각내진 말아달라고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 그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바를 고민하고 실천한다. 현실적이다.
이러한 균형이 <라이프>를 지탱하고 설득력을 제공하는 핵심이다. 조승우였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5년 후를 보라. 10년도 필요없다. 미래의 의료기관은 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닌 가진 자들의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곳이 될꺼라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가히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얼마나 버틸 것인가, 기본이 변질되는 것을 얼마나 저지시킬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들 손에 달린 거겠죠. 무너질 사람, 버텨낼 사람, 거슬러 오를 사람. 완벽하지도 않고 예상 외로 우월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우왕좌왕하는 듯 보여도 끝내는 실천에 이를 사람이, 여기에도 있겠죠. 저는 잠시나마 몸 담았던 상국대학병원, 지켜볼껍니다.
구승효는 위의 대사를 끝으로 상국대병원을 떠난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는 바로 새로운 누군가로 채워진다. 언제나 대체가능한 부품이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키려는 자들이여,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듯한 작품의 시선도 막연하게 희망을 노래하는 순진함보다 내게 더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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