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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겨울] 5주차: 동화 같은 이야기

Library/Club 창작과비평

by 펭펭's 코코 2021. 3. 2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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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화/논단 파트에는 생경한 대목이 참 많다. 특히 <기후위기와 체제전환>이라는 주제의 논단에서는 시장주의가 만들어낸 위기를 시장적 해법으로 풀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여러 해외 사례들이 언급된다. 기후위기가 시장실패의 대표적인 사례임을 인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일환으로 순환 경제 개념을 교육 시스템에 도입한 핀란드의 시트라(SITRA- 정부 재정지원 없는 의회 직속기관으로서 정권교체에 관계없이 장기적 국가전략 수립을 위해 독립적으로 운영) 4차선 도로를 일반 자동차, 트램, 버스, 자전거에게 한 차선씩 배분했다는 노르웨이 오슬로는 그야말로 북유럽이 북유럽한 사례이다. 

지구법(Earth Jurisprudence)에 근거하여 강()의 소유권을 강에 주었다는 뉴질랜드는 어떠한가?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나라의 법학자였기에 비무장지대(DMZ)를 남한의 것도 북한의 것도 아닌 DMZ 자체의 것으로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당 소속으로 작년 여름, 재선에 성공한 프랑스 파리의 안 이달고 시장의 과감한 녹색정책도 놀랍기만 하다.

안 이달고 파리 시장

시내 주차장을 절반 넘게 줄이는 동시에 시내 주행속도를 시속 30킬로미터로 제한함으로써 자동차 의존도를 낮추고, 대형 디지털 광고판을 없애 에너지 소비와 더불어 조작된 소비 욕구를 줄이고, 에어비앤비로 나온 주택을 구매해 영구임대주택으로 바꾸려는 등의 계획

그야말로 동화 같은 이야기다. 지구 다른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니 한편으론 다행이고 부러우면서도 저러한 실천들이 우리에게는 왜 멀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가슴 한편이 답답하고 씁쓸하다. 분단체제라는 특수조건이 가하는 사유, 토론 그리고 정책의 한계 때문일까? 아니면 강준만이 논단, "지방이 지방을 죽인다"에서 지적하듯 안전을 도모하거나 부작용에 미리 대비하는 것은 사치로 여기는 압축성장의 행동강령이 내면화된 탓일까?

정치학에서도 비교정치경제 분야를 전공하고 제도변화와 관련한 주제로 논문을 쓴 나는 제도가 우선이냐 사람이 우선이냐는 질문에 천착한 바 있다. 내게 학문적 영향이 가장 컸던 교수님(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롬 교수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이다)이 제도보다 사람이 우선이라고 단호히 말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나는 이전까지 행위자의 관념과 운신의 폭을 제약하는 제도의 힘에 주목했었다. 이후 행위자들이 제한된 수준이라도 각자 지니는 자율성을 행사하는 과정과 행위자들 간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에 보다 주목했고 훨씬 구체적이고 풍성한 내용물을 건져낼 수 있었다. 사전적으로 주어진 환경과 경로의존은 강력한 힘을 구사하지만 그 또한 구성물의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내용을 대화/논단 리뷰에 언급하는 이유는 다수의 대목들이 판타지 같고 허무맹랑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상상해야한다. 상상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나아질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뉴질랜드의 사례의 저변에는 구성원들의 투쟁이 있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 공동체는 자신들이 신성시하는 황거누이 강을 둘러싼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한 약 150년의 긴 싸움을 벌였다. 2009년부터 시작된 정부-마오리족 간 협상은 2014년 타결되어 2017년 강에 법인격(legal personality)을 부여하는 법안이 의회에 통과된 것이다. 시스템 내에서의 변화이든 획기적인 체제전환이든 절대 그저 주어지는 않는다.

황거누이 강 (출처: 뉴질랜드 의회)

 

다만 나는 강준만처럼 향후 전망에 대해 비관적이다. 지방소멸만이 아니라 기후위기에 관해서도 그렇다. 나의 비관적 전망이 이렇다 할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문에서 언급된 방안들에서는 막연함만 느껴진다. 예를 들어, 탈성장을 위한 관념의 전환은 발언자 스스로가 말하듯이 너무나 난망하다. 사고방식 자체를 바꾼다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란 말인가. 그나마 채효정이 언급한 민주주의 강화가 관념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제일 와 닿았지만 그가 말하는 강화의 구체적인 방식은 그다지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유력한 정치인을 통한 입법이 지니는 한계나 현장의 동력 및 아래로부터의 힘이 지니는 중요성 또한 충분히 공감하지만 지역에서부터 시작되는 반자본주의 풀뿌리운동과 노동자 민중의 기술 및 자본에 대한 통제권 확보는 다소 공허하게 들린다. 사회자의 말처럼 "기후위기가 사회정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 자체로도 거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서 '탈자본주의'이라는 결코 만만치않게 복합적이고 커다란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인 듯하다. 

오히려 사회자가 인용한대로 현재의 기후위기의 주범이 북반구 대도시들임에도 불구하고 도시 생활의 평등주의적 측면이야말로 자원 보존과 탄소 배출 완화에 필요한 최상의 사회적·물리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의 주장이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지구온난화를 통제하려는 노력이 생활수준을 높이고 전세계 빈곤을 퇴치시키려는 싸움과 한데 수렴하여 생산수단의 민주적 통제력을 높이고 공동영역을 확장한다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논단에서는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의 원인을 중앙이 아니라 지방에서 찾아야 한다는 강준만의 지적이 상당히 인상 깊다

마지막으로 가을호 특집편에서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나 또한 결국 와닿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부인하고 조롱하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부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돌아가는 일이 더 나빠지는 일과 동의어가 된 한편, 미래는 한층 앞당겨져서 지난 수십년간 그토록 강렬하게 부인되고 조롱받아온 '대안'의 존재가 어느새 현실이 되었다. 한마디로 대안이 없을 수 없는 세계가 된 것이다. 이제 '어떤' 대안이냐는 문제가 전면에 나선다. 빠르게 달라지는 세계에서 무언가의 실행은 대안의 실천과도 같다. 무엇을 사유하든 거의 불가피하게 거대담론으로 연결되며, 사유의 실험과 삶의 실험 사이의 거리도 훌쩍 가까워진다. -"펜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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