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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일기] 완벽하지 않은 타인 (D+530)

Diary/투병일기(AML)

by 황제코뿔소 2021. 5. 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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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남짓 되었다.

알고 지내던 환우들이 재발 진단을 받았다고 연락을 해온 지가. 한 명은 내 주변에서 ‘청와대 경호처’ 통하는 청년이다. 무균실에서 2차 항암을 하던 당시에 바로 옆 침상에 있던 청년인데, 투병일기에서 몇 번 언급한 적 있다. 그때 이후로 안부를 주고받던 사이였고, 최근에는 숙주반응인지 모르겠으나 탈모 전문 병원을 찾아가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로 머리가 너무 빠진다고 카톡이 오기도 했다. 외래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는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며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 후, 내일 병원에 들어간다고 연락을 받았다. 재발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바로 그날, 수치가 이상하게 나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바로 다음 날에 한국백혈병환우회에서 운영하는 독서모임, ‘쉼표’에 같이 참여하던 환우 한 분이 단톡방에 재발 진단을 받았다고 알려왔다. 환우회 직원 몇 명을 제외하면 카톡방에 있는 사람들이 백혈병을 환자 혹은 보호자로서 겪어 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항암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임을 잘 알고 있다. 그 시간을 다시 보내야 한다니.. 섣부른 위로가 될 지도 모르지만 환우회 사람들과 함께 진심 어린 응원을 보냈다. 염치없지만 기도해달라는 말씀에 두 사람 모두의 회복을 위해 오랜만에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사실 그들에 대한 걱정만큼이나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덜컥 겁도 났다. 그들이 잘 회복하길 바라는 나의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어느새 나는 그들의 처지와 나의 상황을 비교하고 있던 것이다. 독일어는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을 구별한다고 한다. 전자가 공유가능하고 능동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피동적이고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다. 두 사람과 나는 급성골수성 백혈병이라는 같은 병명을 진단받았고, 항암치료 및 이식이라는 매우 유사한 치료 과정을 거쳤으며, 각자 겪은 고통과 좌절은 서로 충분히 공감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병마를 ‘경험’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병마는 결코 능동적이지 않으며, 운이 좋게 이식까지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후의 양상은 너무나 다르다. 그들의 소식에서 번뜩 안도감과 불안감이 들 때 나는 병마의 가장 무서운 점은 외로움임을 상기했다. 아무리 같은 병을 앓는 환우가 정성을 다해 돌보아 주는 보호자가 있어도 결국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 하는 외로운 싸움이라는 것을. 따라서 내가 좋아하는 평론가의 한 구절처럼 “함부로 ‘우리’를 말하는 것이 태만이나 위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히 타인이라는 명제가 참일지는 몰라도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차갑고, 건조하다. 무엇보다 힘겹게나마 살아갈 이유가 가득한 이 삶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는 생각이다. 혼자서 싸운다지만 그 힘은 결코 혼자서 짜낼 수 없다. 용기를 내 그들에게 연락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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