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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일기] 다행이다 다행이야 (D+258)

Diary/투병일기(AML)

by 황제코뿔소 2020. 8. 11.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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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만에 병원을 찾았다. 다행히 혈액검사 결과가 괜찮게 나왔다. '좋게'가 아니라 '괜찮게'인 이유는 역시나 내 맘 같지 않은 수치들이 있기 때문이다. 혈소판과 백혈구, 헤모글로빈 수치가 모두 올랐다. 몇 달 내내 치솟아 올라있던 간수치는 정상치에 근접해졌다. 다만 백혈구 중에 면역을 담당하는 호중구 수치는 조금 떨어졌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블라스트가 검출이 안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나의 수치보다 훨씬 낮은 수준인 이식 후 환자들도 많기도 하며 이식 받은지 아직 1년도 채 안 되었기 때문에 앞선 혈액 수치들의 등락이야 어느 정도 그러려니 할 법하다. 하지만 블라스트 셀(blast cell)은 그 의미가 다르다. 미성숙 세포를 나타내는 블라스트는 혈액암 발병 혹은 재발과 직결되는 수치이다. 물론 소량의 피를 뽑아서 검사하는 혈액검사 상으로 그렇다는 것 뿐이고 상세히 보기 위해서는 골수검사를 진행해야한다. 다음 외래 진료인 한 달 후에 골수검사 예정이다. 올 것이 왔다 ㅠㅠ (벌써부터 무섭..)

하여간 블라스트가 나오지 않고 호중구도 그리 많이 떨어지지는 않아서 이 정도면 검사 결과가 '좋게' 나왔다고 해야 하려나. 어차피 호중구가 더 올랐어도 식단 제한은 여전했을 터.. 주치의 쌤도 호중구가 조금 떨어졌지만 전체적으로 좋아졌다며 왠일로 부드러운 어조로 말씀하셨다. 오후 감염내과 진료에서는 파상풍 2차 예방접종 주사를 맞았다. 골수이식 이후에는 단계별로 거쳐 예방접종을 받아야 한다.  

혈액내과, 감염내과, 소화기내과가 모두 3층에 있다. 

사실 외래 진료는 목요일 예정이었다. 이틀 앞당겨 오늘 방문한 것이었다. 혈액내과 외에도 감염내과, 소화기내과까지 총 3개 과들의 예약시간을 옮겨야 했지만 이유가 있었다. 최근 몇 주간 백혈병 진단 직전에 느꼈던 정도로 극강의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정말 재발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마음을 비우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다. 하필 그 즈음부터 무균실에서도 경험한 바 있는 오른쪽 사타구니와 복부 하단 쪽의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걱정은 가중됐다.

그래서 최대한 신경쓰는 일을 줄이고자 했다. 포스팅으로 기록해두고 싶은 재료들이 쌓여감에도 불구하고 잠시 멈추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평소에도 소비의 속도가 생산의 속도를 따라가고 있지 못하던 터였지만 그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나의 포스팅이 누구에게, 얼마나 유의미할지 모르겠으나 포스팅에는 많은 에너지가 들어간다. 떠도는 생각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순간의 감정과 경험을 기록해두기 위해 블로그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포스팅을 하루만 걸러도 개운치가 않다. 오늘 외래로 한시름 놓았으니 미뤄둔 숙제를 열심히 해야겠다. 물론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를 따라 병원 1층에 자리한 성당에 들려 짧지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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