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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닥이고 쉬어 가는 시간의 흔적

Diary/투병일기(AML)

by 황제코뿔소 2023. 6. 27.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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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백혈병환우회에서 운영하는 독서모임인 쉼표가 있던 날이었다. 이번 달 책은 「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었다. 많이 읽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내가 추천한 책이기도 했기에 참가했다. 6개월 전 재생불량빈혈(혈액암 중 하나이다)을 진단받은 20대 젊은 분이 새로 오셨다. 여전히 우울감이 상당하다고 털어놓은 그녀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이 모임을 알게 되었고 신청했다고 한다. 모임을 마치는 마무리 발언에서 오늘 시간이 너무 값지다며, 스파르타쿠스처럼 굳세게 견뎌내어 이런 자리를 지켜온 것에 감사를 표했다. 
* 내 블로그 방문자의 적지 않은 비중이 백혈병과 관련한 검색어로 유입된다. 환자이건 보호자이건 그분들에게 한국백혈병환우회(https://www.leukemia.kr:45239)는 크고 작은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 합류한 새로운 멤버처럼 희망과 용기를 얻어가면 좋겠다. 아래 글은 올해 환우회에서 개최한 창립 21주년 기념 수기 공모전에 출품했던 글이다. 환우회의 연을 맺어주기도 한 <제2회 수기 공모전>(2019)에 출품했던 글은 여기(https://hworangi.tistory.com/22)에 올려두었다. 한 명이라도 내 글을 통해 아주 조금이라도 공감과 위로를 얻어간다면 감사한 일이겠다. 


 아직도 생생하다. 의사가 내게 백혈병이라고 진단하는 그 순간이. 약간 흐린 아침이었다. 전날, 의사는 정확한 진단은 내일 나오겠지만 일단 오늘 검사를 받고 입원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태어나 처음 골수검사라는 것을 받고, 병상을 배정받기까지 대기하면서 어쩌면 내가 백혈병에 걸린 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 흐린 아침,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알듯 모를 듯한 병명을 들이댔다. 처음에는 멍했다. 차라리 멍하게 있고 싶었으나 이내 좌절과 슬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억울함과 분노까지, 갖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잡아먹었다. 이틀을 내내 울었다.


 그렇게 있을 순 없었다. 이 상황을 받아 들이고 보다 빠르게 본래대로 돌아가야 했다. 우선 병원을 국내에서 가장 많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를 치료한다는 곳으로 옮겼다. 다짜고짜 간다고 내 뜻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넘쳐나는 환자들 중 한명일 뿐이었다. 일반 무균실 병상은 상시 부족이었고, 한시라도 빨리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위해 VIP 병동의 값비싼 비용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나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완전히 다른 경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부터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하루씩 교대로 찾아오던 여자친구가 백혈병환우회의 존재를 알려준 시점도 그즈음이었다. 그녀는 '폭풍 검색'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새 백혈병과 관련된 의학 용어들과 항암에서 이식까지 이르는 치료 과정 전반과 최신 항암제 소식까지 꿰고 있었다. 나의 치료는 전적으로 주치의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병실이 아닌 곳에서 나와 함께 싸워주고 있는 가족과 그녀가 심리적으로는 더 큰 힘이 되었다.


 막 알게 된 백혈병환우회라는 단체에게도 바로 그러한 고마움이 내심 들었다. 환우회는 오래 전부터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활동 중이었다. 표적치료제 건강보험 등재 및 약가 인하, 임의비급여, 공무원 채용 신체검사 불합격 기준, 조혈모세포 기증 제도 등 정말 다방면으로 인식과 제도 개선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그때까지 환우회와의 어떠한 교류도 없었지만 든든한 아군을 얻는 느낌이었다. 1차 항암을 마친 무렵에 환우회에서 진행 중이던 투병 수기 공모전에 지원했고, 2차 항암을 위한 입원 직전에는 창립 기념 행사에 초대받아 다녀왔다.


 수기 공모전은 그 결과를 떠나 작성하는 내내 1차 항암까지의 짧다면 짧은 투병 기간과 이전의 나를 들여다보고 본래의 계획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여전히 찬란히 빛날 미래의 나를 미리 만나볼 수 있었다. 당시의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창립 기념 행사에서는 다른 백혈병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관계자를 만나면서 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점을 피부로 느꼈다. 바로 그 감정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백혈병을 경험한 방식과 현재의 구체적인 상황은 제각각 다를지라도 여기 이렇게 있음에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한 존재이다. 기념 행사에서 낭독한 나의 수기에 눈시울을 붉히며 따뜻하게 공감해준 회원 분들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환우회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어느 덧 5년이다. 치료 당시에도 헌혈증 도움을 받았지만 그간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계기는 책 읽기 모임 '쉼표'이다. 쉼표 첫 모임 당시 나는 여전히 항암 치료 중이었다. 이식을 앞두고 나갔던 회차에서는 진심 가득한 응원을 받았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쭉 참여 중인 멤버는 소수이다. 이후 꾸준히 새로운 멤버들이 합류하고 사라지곤 했다. 누군가는 몇 번의 참여 이후 자연스레 보이지 않고, 또 누군가는 안타까운 이유로 잠시 혹은 더 이상 모임에 나올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내가 책 추천 및 운영 방식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의견도 개진하며 쉼표에 계속 참여하고 있는 데에는 각별한 애정과 고마움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시간이 값지다고 느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제껏 다양한 분야의 많은 책을 읽어왔다. 그 중에서도 박완서 작가의 타계 10주년 에세이 모음집인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가 인상에 깊이 남는다. 박완서 작가는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걷잡을 수 없이 피폐해져가던 때, 이해인 수녀로부터 수녀원에 편히 쉴만한 방이 있으니 언제라도 오라는 말에 '언덕방의 손님'으로 지내게 된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원망만을 되뇌이던 작가에게 그곳의 한 수녀가 이상하다는 듯이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고 생각하느냐' 물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 나에게는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기던 태도와 세상에 대한 원망은 나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몇달 후 미국 유학을 앞두고 병원에서 받은 건강검진에서 백혈병진 진단을 받은 나였다. 더 큰 세상으로 나가서 이제까지 많은 시간을 쏟아온 학업에 더 치열하고 즐겁게 몰입할 기대감만이 가득했다. 또한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인생의 새로운 장을 맞이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백혈병이라니. 이건 너무 가혹했기에,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도 손바닥의 앞과 뒤처럼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싶지만,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 또한 불행을 핑계삼아 횡포를 부린 순간들이 보이고 현재에 감사할 줄 아는 편안함에 이르게 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의 조혈모세포를 통해 나의 또 다른 인생을 꽃 피어 주신 어머니 그리고 투병 기간을 포함하여 9년의 연애 후 이제는 바뀌는 계절을 함께 맞이하고 있는 아내가 없었더라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 시간 속에 빛나는 존재 중 하나가 단연 백혈병환우회, 쉼표이다. 고정멤버들의 얼굴들을 보며 무탈한 안부를 서로 전하는 그 시간의 평범함이 참으로 소중하다. 또한 같은 책과 소재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매번 느낀다. 이 모임은 그 이름처럼 다시금 일구고 있는 나의 일상에 중요한 쉼표이다. 나아가 우리가 공통적으로 겪은 이 아픔이 크게 보면 각자의 인생에서 쉬어 가는 시기가 아니었을까하고 다시 한번 내 자신을 토닥이게 하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마련해주는 환우회와 함께 해 온 멤버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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