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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거야! (<탐페레 공항>, 장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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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제코뿔소 2022. 12. 25.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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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진행하는 랜선 여행 북클럽에 참여했었다. 6개월도 더 지난 일이다. 책은 여행에 관한 단편소설을 모아둔 「여행하는 소설」이었다. 참고로 청년들의 삶을 주제로 한 「땀 흘리는 소설」, 지구와 생명을 테마로 한 「숨 쉬는 소설」 등 특정 주제의 소설을 엮어 만든 창비교육의 테마 소설 시리즈들이 여럿 존재한다. 아무튼 여행이라는 경험을 너무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떨린 마음으로 신청했다. 소액이라지만 굳이 돈을 들여가며 북클럽을 신청하는 이유는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간단하게 남기는 사람들도 있는가하면 꽤나 신경써서 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약간은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들의 글은 챙겨서 읽어봤다. 각자 인상깊게 본 구절도 다르고 공통 질문에 대한 답은 더더욱 다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감상을 읽는 재미가 분명 있다.
「여행하는 소설」, 즐겁게 읽었다. 작게는 수록된 소설들의 배경이 되는 도시에서부터 작가별 특징까지, 다채로움이 있었다. 첫 번째 작품은 장류진의 <탐페레 공항>이다. 소설 속 화자는 '자일리톨'을 매개로 핀란드로 독자를 능숙히 안내한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감동과 약간의 재치, 그리고 화자가 부치는 편지(정확히는 답장)의 첫 단어로 마무리되는 점까지 내게는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화자가 느꼈을 감동이 온전히 내게 전달될 수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는 그 사이의 연결 지점에서 돋보이는 작가의 문장이었다. "하기로 한 일을 해내고 있"는 할머니를 묘사하는 도입에서부터 돋보였다. 지나갈 수 있는 순간과 감정을 잡아내는 작가의 섬세함에서 신뢰가 생기고 작품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는 설렘과 동시에, 이제 준비해 온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는 안도가 교차했다. (p.15)
공항 주변은 줄기가 새하얀 자작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온통 푸르기만 했던 땅이 착륙하면서 하얗게 변하던 순간을, 마치 벨벳의 결을 다르게 넘기는 같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p.19)
노인은 말하는 것보다 더 느린 속도로 빵을 씹고 있었다. (p.20)

<탐페레 공항> 속 여행은 꿈을 재발견하는 여행이다. 주인공은 낯선 땅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한 노인으로부터 평생 잊을 수 없는 울림을 여행이 끝난 이후에 느끼게 된다. 얼마나 극적인 경험인가. 소설 속 주인공만큼은 아니겠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 중 인상적이었던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나는 바로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나의 첫 서핑 선생님(?)이다.
내가 서핑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해 본 장소는 페루 리마이다. 리마의 해변은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장엄했다. 해변에서 꽤나 떨어진 언덕이었지만 해변의 파도를 향해 들이박는 서퍼들이 검은 점으로 보였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해보게 된 서핑이었다. 당연히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수중이든 공중이든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고장이 나버리는 나로서는 가이드가 필요했다. 나 같은 관광객을 상대로 모든 장비와 짧은 레슨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해변에 즐비했다.
내가 큰 고민 없이 선택한 '그'는 수염을 잔뜩 길렀다는 것 외에는 기억나는 바가 없다. 다만 배부르게 남미 바닷물을 먹고 허우적 대느라 정신없던 와중에도 그가 했던 말이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I am right here. Trust me." 그리고 3초라는 짧은 시간의 짜릿한 서핑을 맛보고서 부서지는 파도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는 내게 말했다. "That's it!"
남미 여행을 추억할 때는 그가 꼭 떠오른다. 그의 말이 생각난다.

- 「여행하는 소설」 중 <탐페레 공항>(장류진)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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