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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오렌지처럼 (<콜럼버스의 뼈>, 윤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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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제코뿔소 2023. 1. 10.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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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긴 밤을 사이에 두고 조금 떨어져 있을 뿐(p.65)

우리는 모두가 각자만의 이유로, 각자의 근원을 생각해보곤 한다. 윤고은의 <콜럼버스의 뼈>는 오래된 사진과 주소만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세비야의 골목을 헤매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잘못된 주소로 우연히 만난 현지 가족들을 통해 콜롬버스의 뿌리를 밝혀내는 이야기를 같이 풀어 낸다. 콜롬버스의 출신을 알아내기 위해 안장된 유골을 빻아 잠정적인 후손들의 DNA와 비교한 실화이기도 하다. DNA라는 생물학적 코드를 검사하는 것은 원하는 '답'을 OMR 답안지를 채점하듯 간편하고 정확하게 제시해줄 것 같지만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필체나 언어 습관과 같은 언어학 연구 쪽이 보다 유의미한 결과들을 냈다고 한다.

콜롬버스의 국적 논란을 종결!하지 못한다면 유의미함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떠나, 어떠한 연구방법론이 더 적합한지를 떠나 나로서는 콜롬버스의 국적이야 알게 뭐람 싶다. 이러한 시큰둥함은 내가 콜럼버스의 잠정적인 후손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뿌리는 현재의 나에 지극한 영향을 미치며, 나의 뼈의 출처를 기어이 알아내야만 하는 상황을 소설과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마주한 바 있다. 다만 뿌리 그 자체보다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수용하게 되는 과정이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 소설 속 콜롬의 아버지에게 누가 자신의 친자식인지는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사실은 노랫말의 일부였던 주인공의 수첩 속 주소는 언제나 바뀔 수 있지만 화자의 아버지의 집은 분명 그 노래 안에, "아버지는 그밤,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최근 몇년, 나는 안테나를 곤두선 채로 살아야만 했다. 앞으로의 계절을 쭉 함께 맞이하고 싶은 사람과 결혼한 이후 어느 정도 편안함에 이르렀다. 그 전에는 마음 속에 꼭 안고만 있던 몇 가지를 "오렌지 나무의 오렌지처럼 가볍게" 걸어 놓은 덕분이 아닐까. 다만 굵직한 결정과 거침없는 실행이 필요한 최근에는 또 다시 불안과 걱정이 엄습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오렌지처럼 가볍게 걸어두고 다음 골목으로 가보는 수밖에.

남자는 다음 골목에 더 좋은 곳이 있을 거라고 했다.(p.68)

<콜럼버스의 뼈>는 서두부터 거슬리는 문장들이 다수 있었다. 시적인 표현들이 작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미에 가서는 작품 속 배경인 세비야에 최면에 걸린 듯 몽롱해졌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터라 정조와 주제를 위해 의도된 문체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웃풍이 드는 방구석에서 약간은 뜨거운 햇빛을 맞으며 세비야 골목을 누비고 온 것만 같다. 

- 「여행하는 소설」 중 <콜럼버스의 뼈>(윤고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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