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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 당일치기 여행 ② 박수근의 겨울 그리고 봄을 잘 새겨둔 양구 박수근미술관

밖으로/언제나 여행

by 황제코뿔소 2024. 1. 23.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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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 당일치기 여행(2023.12.13) ② 박수근미술관

written by 펭귄

옥천식당을 나와,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사실, 이유 있는 배회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도를 검색해 봐도, 핫도그 가게는 나오지 않았다. 믿기지 않았다. 내장탕을 먹었으니 후식으로 핫도그를 먹어줘야 하는데 어떻게 시장에서 팔지 않는단 말인가. 우린 시장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있는 조금 번화한 거리에 갔다. 그곳엔 다행히 ‘스마일 명품 찰진꽈배기’가 위치해 있었고 핫도그와 꽈배기를 먹을 수 있었다. 기대했던 시장 버전은 아니었으나 아쉬운 대로 입과 배를 달랠 수 있었다. 

 

12월에 서울 근교 당일치기 여행지를 고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 겨울에 서울과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갈 건데, 잠을 자지 않고 하루 만에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고 또는 무언가를 남기고 올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행의 컨셉이 명확해야 한다. 오감 중 어느 하나에 에너지를 집중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우린 눈으로 즐기는 여행을 선택했다. 미술관 또는 그런 컨셉을 지닌 카페를 포함하여 여행지 후보는 총 세 곳이었다. 각 여행지를 알아보던 중 박수근 미술관의 돌담 이미지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 여기다. 

 

박수근 미술관 초입엔 말 그대로 돌담이 있다. 투박한 돌로 만들어진 담장을 실물로 보니 정겨운 마음마저 든다. 돌담 뒤에는 돌담과 똑같은 돌로 만들어진 전시관이 우뚝 서 있다. 그런데 막상 돌담을 지나 미술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발길이 닿는 곳은 전시관이 아니라 자작나무 숲이다. 겨울이라 앙상한 나무들만이 제자리를 지키며 서 있었지만, 이를 지나면 빨래터가 나온다. 김홍도와 박수근은 모두 빨래터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분명, 두 화가의 <빨래터>는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자작나무 숲 옆 빨래터에 들어서면 두 화가의 <빨래터>에서 묘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가슴이 두근두근, 쿵쾅쿵쾅’

 

라키비움에서 전시 중이던 미디어아트 <빨래터>

본디, 빨래터란 아낙네들이 모여 방망이질을 해가며 빨래하고 대화하며 온갖 소문이 생성되고 유포되며 그 진위에 대한 열띤 토론까지 진행되던 그러한 여성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런 빨래터가 젊은 박수근 화가에겐 역사적 장소가 된다. 빨래터에 있던 젊은 김복순 여사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만 것이다. 여성들만이 모여있는 삶의 현장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에 따라 김홍도와 박수근의 차이가 발생한다. 박수근의 <빨래터>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진 것은 그의 화풍이 그러한 것도 있겠으나, 아내와의 추억을 빼놓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빨래터에서 김복순을 보고 첫 눈에 반한 박수근이 보낸 편지 중 일부-

 

 

박수근 미술관은 총 다섯 개의 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관에서는 다섯 관을 돌기 위한 관람 순서를 안내해 준다. 관람자의 동선보단, 관람자들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건축학적 미를 살리려 한 것 같다. ‘박수근 기념 전시관 – 박수근 파빌리온 – 박수근 라키비움 – 현대미술관 – 어린이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총 다섯 개의 관을 모두 둘러보는 사람은 적지 않을까. 우린 선택과 집중을 하되, 미술관 곳곳에 위치한 전망 포인트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 취했다. 하나의 관에서 다른 관으로 넘어갈 때마다 지나야 하는 길들은 모두 단조롭지 않았다. 특색있는 길도 좋았지만, 샛길을 통해 언덕 위를 올라가 좀 더 높은 곳에서 미술관 전체를 조망하며 볼 수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미술관을 관람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굴비>와 건축이다. 박수근 화가는 워낙 널리 알려진 서민 화가이기 때문에 유명한 그의 그림을 꼽자면 몇 가지 나열할 수 있다. 그러나 <굴비>는 말 그대로 굴비여서 좋았다. 굴비라는 단어를 입으로 소리 내서 말하면 왠지 기분이 좋다. 입 모양도, 혀도 굴려지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렇게 소리 내서 말하거나 굴비를 떠올려 보면, 곧바로 침이 고인다. 맛있는 굴비는 나의 입꼬리를 올리며 웃게 한다. 그런데 굴비는 고등어만큼 자주 먹는 생선은 아니다. 고급 생선에 속하여 명절마다 상 위에 올려지곤 했다. 그렇다고 꼭 명절 때만 먹은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일부러 굴비를 사서 먹기보다는 선물을 받아서 먹곤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굴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나만의 기억이라기보단 우리 모두의 기억인 듯하다. 아직도 굴비는 명절 선물 품목 중 하나니까. 

 

 

우연히 함께한 큐레이터의 설명에 의하면, 박수근 화가의 <굴비>도 이런 보편적인 굴비의 내력 안에서 그려졌다. 가난했던 화가는 실물 대신 그림으로 굴비를 그려 지인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그 중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이 기증한 <굴비>는 이곳에 오기까지 독특한 내력을 지녔다. 박수근 화가가 세상과 작고한 후 그의 아내인 김복순 여사는 <굴비>를 박 회장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선물했다. 몇 년 후, 박 회장은 이 그림을 당시 2만 5,000원에 팔았다가 박수근 미술관 개관 후 2억 5,000만 원에 되사서 미술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림의 가치가 엄청나게 뛴 것보단 그림을 되사서 기증하는 과정에서 느꼈을 박 회장의 마음이 더 놀라웠다. 가난한 화가에게 받은 선물에 값을 매겨 팔았던 지난날을 후회하고 이 그림을 다시 화가에게 돌려주기 위해 값을 치러야 했던 미안함은 화가와 후원자(지지자)의 우정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혹시 당신도 누군가에게 받은 귀중한 선물에 헐값을 매겨 당근에 올리고 있진 않은가? 당근.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 석물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조형화에 도입하고자 애 쓰고 있다.”

-박수근-

 

박수근 미술관은 한국건축가협회상, 강원도 경관우수건축물 특별상을 수상할 정도로 건축학적 가치가 상당하다. 건축학적인 가치를 논하기엔 내가 너무 무지하지만, 분명 누구나 미술관을 직접 보면 그 빼어난 미(美)와 탁월함에 감탄할 것이다. 겉보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박수근 화가를 ‘새기기’ 위한 설계가 똑똑하다. 박수근 화가는 암석의 거친 질감을 눈으로 느끼게 하는 독특한 마티에르(matière)를 구현한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미석(美石)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회백색의 화강석을 사용한 석물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고, 돌의 표면을 그림으로 그려나갔다. 미술관도 화강석을 이용해 박수근 화가의 마티에르를 건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박수근 미술관에선 인간 박수근(빨래터)과 화가 박수근(전시관)을 모두 만날 수 있다. 관람을 마치고 나면, 건축가의 세심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화가의 그림을 보기 전, 시냇물을 지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화가의 그림을 이해하게 된다. 

 

 

이상하리만치 기다란 구릉의 끝에 대지가 놓여있다. 구릉지의 끝은 논에 의해 침식되어 있다. 밭은 지형에 적응하지만 논은 지형을 잠식한다. 논은 제2의 자연이기 보다는 자연과 맞서 온 강한 인공이다. 문득 또 다른 인공물인 미술관으로 침식되었던 그 구릉의 끝을 매만지겠다는 생각을 다듬는다. (중략) 미술관은 관람자와 박수근을 만나게 해 주는 장치여야 한다. 만남은 관람자를 일상의 풍경에서 다른 세계로 이끌며 시작된다. 미술관 주변의 먼 풍경을 보이며 점점 좁혀 돌아 들어가는 통로가 관람자를 미술관의 안마당으로 이끈다. 고요한 안마당과 원래부터 흐르던 시냇물, 건물의 벽과 함께 마당을 막아선 언덕, 벽을 따라 돌다 언덕을 타고 흐르는 관람자의 시선은 하늘로 향한다. 호흡은 최대한 가라앉는다. 하늘과 시설 사이에서 관람자는 장소가 품고 있는 의미에 투사된다. 이제 관람자는 미술관이 준비해 놓은 박수근의 작업을 만나기 위한 충분한 상태에 이른다.

-건축사사무소 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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