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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기리며] 잊어서는 안 될 광기의 소용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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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제코뿔소 2020. 4. 7.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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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에 맞추려던 포스팅이었으나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늦었더라도 이렇게 남겨본다. 

제주 4.3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니 알고는 있는가?

  제주 4.3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을 뜻하는데, 말이 무력충돌이지 사실상 토벌대의 무자비한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그 배경에는 1947년 3월 1일에 발생한 제주 3.1 발포사건이 있다. 이 날은 제주도민 약 3만여명(제주도 인구의 1/5 이상에 해당)이 모여서 제 28주년 삼일절 기념대회를 개최한 날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도를 군사기지로 활용하던 일본 놈들은 기지 건설에 제주도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거나 재산을 뺏어가는 등 착취를 일삼았다. 해방 이후 3년간 38도 선 이남을 지배해오던 미 군정은 일제가 사용하던 행정시스템과 다양한 자원들을 그대로 활용한다. 그 중 핵심이 바로 인적자원이고 미군정은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던 친일 경찰들을 그대로 등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전국적인 분노가 제주도에서도 분출되었고 항의를 표하기 위해 1947년 3월 1일에 대규모 집회를 연 것이었다. 

 그런데 경찰들은 대규모 인파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게 된다. 이로 인해 갓난아기를 안고 있던 20대 엄마와 초등학생을 포함하여 총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게 된다. 경찰은 나아가 이러한 과잉진압의 책임을 군중들에게 전가하면서 통행 금지령을 내리고 관계자 체포에까지 나서게 된다. 육지에서는 수백 명의 경찰 지원 병력까지 내려 보내지만 경찰의 행태에 도민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3월 10일부터 민관 합동 총파업을 실시하고 중앙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민간 뿐만 아니라 공무원들도 참여하는 민관 총파업은 세계사에서도 그 사례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많은 참고가 된 <차이나는 클라스> 57회 방송(2018.04.11)

  파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3.1 시위 당시 경찰의 발포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 그리고 희생자 및 유가족 지원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 군정과 경찰은 이러한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 선동된 좌익 세력으로 몰아갔다. 파업 과정에서 남로당이 적극적인 역할을 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시위자들의 요구는 이념을 떠나 지극히 상식적인 선이었다. 공무원들을 포함한 많은 도민들이 파업에 참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짐작하겠지만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미 군정과 경찰의 대응이 제주 4.3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선 파업에 참여한 경찰들을 해산시키고 그 자리를 육지에서 온 서북청년단 강경파 인물들로 채운다. 서북청년단, 이들은 해방정부 때 활동했던 극우 청년 단체로서 반공을 명분으로 폭력을 일삼은 사실상 테러단체이다. 이들은 육지로부터 파견될 때 돈 한 푼 지급받지 않고 제주도에서 알아서 자급자족 하라고 지시받는다. 그렇다보니 서북청년단도 제주도에서의 약탈은 예견된 수순이었던 것이다. 누가 이들을 더욱 악랄하게 만들었는지도 분명 기억해야할 부분이다. 

  이 와중에 유해진이라는 사람이 신임 도지사로 오게 되는데 중앙에서 어떠한 성향의 인물을 보냈겠는가(지방자치단체장은 1960년에 와서야 투표로 선출된다)? 한마디로 극우 인사였다. 도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태를 수습하기커녕 강경히 탄압해야한다는 입장을 교수하던 인물이었다. 거기다가 1948년에는 경찰에 끌려간 젊은이 3명이 고문에 의해 죽게 된다. 

김익렬과 김달삼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중앙당의 지시없이 단독으로 무장투쟁을 결정하게 된다. 1948년 4월 3일 김달삼이 이끄는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300여명의 무장대가 경찰서와 우익인사의 집을 습격하면서 봉기가 시작된다. 이때 미군정이 파견한 김익렬 경비대장은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무장대와 협상을 시도한다. 그러나 평화 협정 기간 내내 지속된 경찰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협상은 결렬된다. 그 중 하나가 경찰이 일부러 민가에 불을 지르고는 무장대가 했다는 가짜뉴스를 퍼트리며 거짓증언까지 만들어 낸 오라리 방화사건(1948.05.01)이다. 

출처: 제주4.3평화재단

  당시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선거인 5.10 총선거를 앞둔 때였다. 여기서 선출된 재헌 국회의원들이 헌법도 만들고 대통령도 선출하여 초대 정부도 구성한 것이다. 이 선거는 아직 정부가 없는 상태였던 우리나라에서 누가 어떻게 통일된 정부를 만들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만큼 갈등도 치열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선거가 가능한 남한 지방에서만이라도 먼저 선거를 열자고 주장했고 김구, 김규식 등은 이승만의 그러한 주장은 남한 단독 정부를 세움으로써 분단의 영구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5.10 총선거를 반대했다. 남로당 무장대도 이 선거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남로당과 무관한 많은 주민들도 민족 분단에 반대하면서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5.10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지역이 된다. 결국 실시된 총선거에서 대통령이 된 이승만에게 제주도는 어떠했겠는가?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초토화 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을 시작하면서 대학살이 펼쳐진다. 그 내용이 정말 끔찍하다. 총살자의 가족에게 총살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만세를 부르거나 박수를 치게하고 심심풀이로 주민들을 상대로 사살 연습을 벌였다고 한다. 유태인을 상대로 벌였던 나치의 광기를 결코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만 관찰되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를 휩쓴 거무장대인 척 잠입하여 주민들에게 도와달라고 한 뒤에 주민들이 도와주면 바로 죽이는 함정 토벌이나 마을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두고 학살해버리는 관광 총살 등을 통해 토벌대는 마을을 돌아 다니며 만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희생자 중에서 노인과 어린이의 비율만 12%에 다다른다. 남로당에 의해 희생된 주민들도 있었으나 압도적으로 많은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토벌대를 격려 중인 이승만 (출처: 제주4.3평화박물관)

  토벌대에 남로당에 이중으로 고통받은 제주도민들. 6.25 전쟁을 거쳐 1954년이 되어서야 사태는 수그러들게 된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이 최소 3만명에서 최대 8만명까지 이른다고 한다. 살아남은 희생자들은 빨갱이라는 누명을 써야만 했다. 이 때문에 유족들은 희생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고, 4.3의 역사적 진실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수면 아래 감춰져왔다. 2000년에 4.3 사건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에는 정부의 정식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2008년에는 제주평화공원이 세워졌다. 제주도 자전거 일주 당시 들렸었는데 추모와 학습 그리고 휴식의 공간으로 되게 잘 만들어 놓았다. 제주도를 방문할 때 한번쯤 들려보기를 추천한다. 

  끝으로 4.3 사건을 다룬 <지슬>이라는 영화도 추천한다. 지슬은 제주도 사투리로 감자를 뜻한다. 1948년말 약 2달간 토벌대를 피해 동굴에 숨어 지내다가 결국 희생당한 안덕면 동광리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출처: 다음 영화

  아직까지도 제주도 마을에서 제사가 비슷한 날에 치러진다고 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끔찍한 사건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기억해야 역사이다. 나의 포스팅은 보잘 것 없지만 이렇게나마 추모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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