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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포드 파크(2001)- 수많은 등장인물을 지휘하는 거장의 우아한 냉소

Theatre/movie

by 황제코뿔소 2020. 4. 11.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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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11월 윌리엄 맥코들 경과 그의 부인 실비아는 저택인 '고스포드 파크'에서 그들이 초대한 친척들과 친구들을 맞이한다. 사냥 파티를 위해 영국 전역에서 온 귀족들과 미국의 영화제작 관계자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함께 온 하인들까지, 대저택은 시끌벅적해진다. 위층에서는 상류층들이 화려한 파티를 벌이며 허영을 떨기 바쁘지만 아래층에서는 이들을 시중하는 하인들과 하녀들이 개미처럼 바삐 움직인다. 메인 이벤트였던 꿩 사냥도 마치고 '귀하신' 손님들의 파티가 한참이던 중 주최자인 맥코들 경이 흉기에 찔린 채 발견된다. 형사들이 현장에 출동하지만 범인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고스포드 파크>의 줄거리이다. 이러한 플롯의 영화들을 후더닛 무비라 부른다. 후더닛(Whodunit) 무비누가 사건을 저질렀는지 범죄와 그 해결에 주목하는 장르이다. 이 장르의 영화들은 보통 탐정이나 경찰이 나와서 범죄를 추리하고 범인을 지목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범인이 누군지 너무 명백하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출연하는 등장인물들이 많고 의심되는 인물이 여럿인 상황이 연출된다. 이 때문에 여러 출연자들의 개별 정보와 관계를 파악해야만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장르이다. 

 

<오리엔트 특급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 2017)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이 장르의 아주 대표적인 작품일 것이다. 해당 영화의 원작 뿐만 아니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을 집필한 애거사 크리스티는 엄청난 반전과 트릭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추리의 여왕으로도 유명하다. 

 

애거사 크리스티

 

  <고스포드 파크>는 분명 나름의 차별성이 있다. 우선 <오리엔트 특급살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등장인물들이 텀 없이 초반에 쏟아져 나온다. 상류층은 파티복, 시중들은 하녀복과 하인 정장으로 등장인물들의 복장이 비슷비슷해서 등장인물들을 파악하는데 더 애가 쓰인다. 시중들은 지하의 그들만의 세계에서 자신의 고용주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에 관객은 더 헷갈린다.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는 우중충한 분위기도 이에 한 몫해서 본 작품은 초반부를 지나는데 확실히 참을성이 필요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 초반부를 잘 이겨내면 서서히 드러나는 상류층 귀족과 하인들의 얽힌 관계들과 함께 폭발하는 이 작품의 매력을 느껴볼 수 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동선과 관계를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하게 조율해낸 연출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다. 얼핏 보기에 상층과 하층의 세계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녀들은 위층에서 시중을 드는 과정에서 다른 귀족의 비밀을 듣게 되거나 부부싸움을 목격하기도 한다. 반대로 하녀와 정사를 나누기 위해 아래로 내려오는 귀족도 있다. 계단으로 상징되는 수직적인 계급 구조 속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안주인에게 대항하는 '엘시' 같은 캐릭터도 있다. 다양한 인물들과 뒤얽힌 관계만큼 '맥코들'의 죽음을 앞두고 펼쳐지는 복잡한 동선은 '누가 살인을 저질렀을까?'하는 서스펜스를 관객으로 하여금 유지하게 한다. 

  이는 치밀한 연출과 잘 짜여진 각본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고스포드 파크>는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거장이라 불리는 로버트 알트만이 본 작품의 감독 그리고 공동각본을 맡았다. 그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다중 플롯의 원조 격이다. 나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내쉬빌>(Nashville, 1975)보다 <고스포드 파크>를 더 재밋게 봤다. 2006년에 작고하여 더이상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순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로버트 알트만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보자. <고스포드 파크>의 특별한 점은 <오리엔탈 특급 살인>의 푸아로처럼 유능한 탐정이 출연하지 않는 것이다. 살인사건 자체가 영화 중후반에 가서야 발생하고 그렇게 뒤늦게 나타나는 톰슨 경위는 무능하고 사건 해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사건이 초반에 발생하고 관객이 탐정 혹은 형사의 시점에서 단서를 하나씩 발견해나가는 이러한 장르의 전형적인 서사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이는 감독이 분명 장르적인 접근 그 이상을 의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고스포드 파크> 내의 '미국인'의 존재는 특기할만하다. 이들은 크게 상류층에 속하기는 하지만 귀족과 하인 모두와 구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사냥파티에 초대받은 미국인들은 할리우드 제작자와 배우들이다. 이들 중 '헨리'는 도착한 직후 '재미로' 하인 행세를 하며 하층의 세계에 숨어든다. 한편 유명한 배우인 '이보르'는 파티 도중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이 순간 구분되어 있던 상하층의 세계는 무너진다. '맥코들'이 사라진 은칼에 찔리는 것도 바로 이때다.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제작자 '와이즈만'가 준비 중인 다음 영화는 대저택에서 부호가 살해당하고 범인을 찾아내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맥코들'이 살해된 채 발견된 이후에도 '와이즈만'은 자신의 영화 제작 관련 업무를 처리하느라 국제전화하기에 바쁘다. 

 

'이보르'가 파티의 흥을 띄우는 동안 하인들은 일손을 놓고 함께 여유를 즐긴다. 그리고 범인은 살인을 저지른다.

 

  극 중에서 미국인들은 영국인들 사이를 제멋대로 돌아다니지만 결국 일어나는 일들의 밖에서 그것들을 변주할 뿐이다. 이는 제1,2차 세계 대전에서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참전을 미루던 미국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작품이 맨 앞에서 전간기(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20년을 의미)에 해당하는 "November, 1932" 라는 시기를 구체적으로 밝힌다는 점과 상류층이 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1차 세계 대전과 대영제국의 몰락에 관한 대화는 이러한 역사적 해석을 방증한다. 유럽의 관점에서는 미국이 개척의 땅, 신대륙이었던 점을 상기해보면 하녀 주제에 감히 안주인에게 반기를 들었기에 더이상 고스포드 파크에서 일할 수 없는 '엘시'가 미국인 '와이즈만'의 차를 타고 떠난다는 설정도 유의미하게 보이게 된다.

  나아가 사건의 범인과 살인동기를 상기해보면 '맥코들'로 대표되는 상류층을 제국주의적 통치를 자행했던 국가들로, 이들을 떠받치는 시중들을 그 식민지로 볼 수도 있겠다. 마지막 장면에서 비추어지는 텅 빈 고스포드 파크는 2번의 세계대전으로 세계 질서의 주도권을 놓고마는 영국 혹은 유럽을 상징하게 된다. 

 

출처: 다음 영화

 

  포스터에 기재된 것처럼 죽은 사람은 1명인데 죽인 사람은 2명이라는 점이 <고스포드 파크>의 또 다른 흥미로운 설정이다. 공모의 형태가 아니라 두 명의 개별 범행으로 '맥코들'은 두 번 죽게 된다. 이 죽음을 기점으로 영화 후반부는 범인들 간의 관계 뿐만 아니라 피해자-가해자 그리고 다른 등장인물 간의 숨겨진 관계가 일종의 반전처럼 휘몰아친다. 범인 개인이 아니라 범인을 둘러싼 관계를 조망하면서 거장의 우아한 오케스트라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물론 이는 초반부를 견뎌낸 자들에게만 허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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