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노출이 많고 그의 등장이 ‘포스트 미래파’라고 하는 새로운 흐름을 상징할 정도의 존재감이라지만, 나는 황인찬이라는 시인을 이번 <작가조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사실 내가 작품을 면밀히 읽어봤을 수준으로 ‘아는’ 시인 자체가 몇 안 된다. 이처럼 인터뷰 대상과 내용이 생소한 사람으로서 <작가조명>은 내게 어느 정도는 친절한 편이었다. 작가만이 아니라 작가라는 텍스트(text)가 속해있는 컨택스트(context)를 일정 부분 함께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파’로 호명되던 2000년대 시의 미학적 고군분투를 설명하고 있는 4번 꼭지가 특히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조명>이 조금 더 친절해지면 어떨까 싶다. 소비하는 방식의 변화를 언급하는 5번 꼭지의 서두가 대표적이다. 소비는 독자의 몫이기에 텍스트 바깥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처럼 ‘마니아화’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일련의 2010년대적 변화’가 무엇인지 설명이 필요하다. 또한 황인찬 시인이 소통 불능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래서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그리고 무슨 근거로 그러한 비난 혹은 비판으로 자유롭다는 것인지 최소한 본 <작가조명>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조명>이 질의응답을 단순히 옮겨놓은 대담 형식이 아니라 인터뷰어가 저자로서 일종의 가이드를 제공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형식이 마음에 들었다. 황인찬 시인의 고민과 작품 내 발견되는 변화를 일반화하여 아래와 같이 표현한 부분은 정말 탁월했다.
“이전의 아름다움에서 조금 더 멀리 가보려는 것, 이전에 아름다움이라고 믿어왔던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뒤에 오는 모든 시인들의 욕망이자 용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방식은 시인들마다 천차만별이다. 문학과 예술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p.290)
나를 들여다보게 한 지점은 시의 효용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은연중에 시가 아무런 효용을 추구하지 않기를 바래왔다. 그것이 시의 쓸모라고 생각해왔다. 어쩌면 기대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를 시대의 변화에 굼뜬 ‘쓰기’라는 영역의 한 부분으로, 그것도 난해함의 대명사인 장르로 대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동시에 바래왔다. 시인은 언어를 수단화하지 않는 작가이기에 목소리에 그만큼 무게가 더 실릴 수 있으며 그러기에 나설 때는 나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쓰잘데기’를 찾는 황인찬 시인의 고민에서 시를 바라보는 나의 이러한 이중적인 시선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다만 시가 어디 ‘쓰잘데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시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p.288)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 세가지를 포함하여 리뷰하라는 이번 주 미션을 그의 작품을 더 읽어보지 않은 채 게을리 수행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모두가 멈추는 것이면 몰라도 나 혼자 멈추고 혼자 생각하고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구체적으로는 무엇인가요?
2) ‘정직하게 쓰는 것’과 ‘잘 쓰는 것’은 양립 불가한 것으로 보시는 건가요? (경험없이 이해하고자 하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3) ‘우리의 시대’가 ‘퀴어한 시’ 외에 무엇이 가능한 시대이길 희망하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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