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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봄] 3주차: 나를 매혹한 <유명한 정희>

Library/Club 창작과비평

by 황제코뿔소 2020. 3. 2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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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욱 작가<유명한 정희>는 이번 주 미션이었던 소설들 중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여태까지 내가 접한 단편소설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다. 도입부부터 작품에 몰입된 것은 아니었다. ‘나’와 ‘정희’의 잠수놀이를 회고하듯 서술하는 도입부에서는 되려 주춤했다. 회고의 대상은 어린 시절인데 그 화법(문체)에는 짙은 연륜이 묻어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희’라는 캐릭터 자체가 주는 어색함 때문이 클 것이다. ‘정신적 교분’, “묵념을 하고 있으면, 나는 혼자가 아니다”와 같이 나이대와 결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나 “건조하고 무뚝뚝한 표정”에서 투사되는 거리감은 ‘정희’라는 캐릭터를 뚫고 나와서는 나와 작품 간의 거리까지 유지키셨다.

  그렇게 ‘정희’가 꼬아놓은 나의 팔짱은 각을 곽으로 발음하는 학생주임의 설정과 함께 “대통령 곽하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작가의 서술에 무장해제 되었다. ‘정희’의 이름이 정희인 것도 ‘정희’의 성이 곽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물론 ‘나’의 이름이 ‘정희’인 것도 말이다.

  <유명한 정희>가 내 마음을 훔친 가장 도드라진 이유는 앞선 내용과 표현을 다시금 길러와 이어나간다는 점이다. 대구적인 구조로부터 촘촘함에서 느끼는 희열감을 읽어내는 것은 순전히 개인 취향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것만으로 내겐 충분한 일이겠지만 '개취'를 뛰어넘는 훌륭함이 이 작품에는 있다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머리로 안다고 해서 진정으로 자각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를 진실로 깊이 자각한다면, 이 세상은 벌써 천국이 되었거나......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소설을 갈무리하는 위의 문장이 동일하게 삽입되어 있는 앞선 부분을 보라. 본 문장은 동년배들에 비해 우월감을 느끼는 한편으로 그 우월감이 얼마나 조야한 것인지 스스로 '알고 있던' 고등학교 시절의 화자와 환자도 모르는 환자의 내면을 '알아야 하는'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에 종착하게 되는 화자를 연결하고 있다. 반복되는 표현이 결코 허투루 쓰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화자가 자신과 그렇게도 다른 '정희'를 거울 보듯 바라본 이유 중 하나였던 자신의 이름을 모친의 입을 통해 밝히는 장면도 빨간 물통에서 고개를 내민 '정희'에게서 다급히 도망친 정황을 화자가 끝에 가서 설명하는 장면도 앞뒤 내용의 절묘한 연결성만이 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담고 있다. 

  작품의 문체는 질서있게 직조된 구조와 되려 대조된다는 측면이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이었다. 앞선 내용을 충분히 의식해야만 음미할 수 있는 구조와는 정반대로 작가가 작품을 서술하는 방식은 상당히 자유롭고 거침없다. 반복해서 쓰이는 “복잡한가? 당연하다. 나도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으니까.”라는 표현이나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라는 경어체로 시작해서 “나는....... 이런 생활을 견딜 수 없어”로 끝나는 아내의 이혼 요구 장면이 대표적이다. “시대가 어느 시댄데 아직도 그런......이라고 말한 쪽은 내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들려준 정희의 조카였다.” 등과 같이 독자를 상대로 한 ‘훼이크 문체’도 이에 포함될 것이다.

  가장 인상깊은 대목은 ‘태극기 부대’ 단상에 올라서 열변을 토하는 ‘정희’와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 목적 없이 거리를 걷던 ‘정희’가 눈을 맞추는 장면이다.

나도 정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오래 바라보았다. 노려보았다고 해도 좋았다. 주위의 소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낙엽이 지고 있었다. 석양이 드리우고 있었다. 이윽고 깊은 침묵이 시작되었다.”

  이 부분이 놀라운 이유는 분명 소설을 읽고 있는데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시끄럽던 주변이 점차 조용해지는 청각적, 낙엽과 석양이 내 눈앞에 겹쳐지는 시각적, 두 정희가 묵념과 잠수놀이를 할 때 공유하던 그 침묵이 나에게로까지 차오르는 예술적 경험 말이다.

  동시에 이 작품은 문학이라는 매개만이 선사할 수 있는 서정성을 여과 없이 발휘한다. “나는 내 방에 물속처럼 잠겨들었다”를 한 예로 들 수 있겠다. 작가는 이 짧은 문장 속에 ‘나’가 중고등학생 때 마주한 고독을 ‘정희’와 함께 했던 잠수놀이의 연장에서 표현하는 탁월함을 보인다.

여름이었고 하늘이 높았던가. 가을이었고 낙엽이 지고 있었던가. 하늘이 높거나 낙엽이 지는 그런 오후에 청소를 하다가 빨간 물통에 고개를 처박는 것, 그게 나에게는 초등학생의 삶이었다.”

  본 작품으로 '정희'만큼이나 이장욱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뇌리에 새겨졌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어서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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