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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봄] 2주차: '시'에 대한 소고

Library/Club 창작과비평

by 황제코뿔소 2020. 3. 2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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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소고

  몰입의 단계에 다다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스스로를 산만하다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이라 그러한지, 선천적인 ‘문학센스’의 결함 혹은 후천적인 노력의 부족함 때문이든(아마 둘 다일 것이다) 시는 읽을 때마다 힘들다. 그럼에도 문학 장르에 있어 선택지가 주어질 경우 난 시를 찾는다.

  왜 힘이 드는지부터 얘기해야겠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러 번 읽어보기도, 소리 내어 낭독해보기도, 친구에게 읽어보라 하고 느낌을 물어봐도 그 시와의 교감에 실패할 때 힘이 든다. 신해욱 시인의 시가 내겐 그렇다. <귀부인과 할머니>는 길지 않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 내가 읽어 마땅한 주제가 무엇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형님’과 ‘올케’의 서오릉 나들이. 이것이 정말 다일까? 숨겨진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내가 놓친 것은 없나? 이러한 나홀로 보물찾기로 인해 다음 시로 옮겨가는 내 발걸음은 상당히 더딘 편이다. <행잉 게임>처럼 아예 길을 잃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작품과의 교감 시도에서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이러한 ‘헤메임’이 한편으로는 내가 다른 장르에 비해 시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하다. 교감에 성공했다는 느낌 또한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다희 시인의 <공복>이 내겐 그렇다. 잘 짜인 구조와 세밀한 관찰이 식사 전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평범한 장면들을 특별하게 만든다. 국수 면발을 닮은 머리카락은 분실물 알리미가 되어 화자를 달리게 한다. 알전구가 깜빡거리는 속도가 왜 하필 “병을 앓고 난 후 스스로가 정말 괜찮은지 알아보기 위해 천천히 달려보는 사람의 속도”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아파서 누워만 있다가 이제야 조금씩 걸어보려는 나에게는 그 속도마저 남다르게 다가왔다.

  시라는 장르는 작품과 나와의 궁합을 즉각적으로 알려준다는 매력 외에도 나를 소환하고 이 사회를 소환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김사이 시인의 <견고한 지붕 아래>는 “나는 과연 ‘허공에 부유하는 성실한 알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야만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는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한다.

오랜 패배의 냄새는 퀴퀴한 지하방 같고
오랜 침묵의 냄새는 엇박자 기침 같은
야만의 시간으로 뚜벅뚜벅 들어간다
단단해진 절망을 잘근잘근 씹는다

  한편 장석남 시인의 <법의 자서전>은 사문서위조 혐의를 장모냐 직장상사가 된 대학교수냐에 따라 상이하게 들이대는 현재의 검찰 뿐만 아니라 법꾸라지, 사법농단의 주범 등 다양한 범인들의 몽타주를 그리고 있다. 칼은 살인도구가 될 수 있지만 칼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그 죄가 있는 것처럼.

나는 모질고 가혹해요
잔머리 좋은 종들이 있거든요
설쳐댈 때가 많지만 만류하진 않아요
그 짓 하려고 어린 시절 고생 좀 한 것들이거든요
만인 앞에 나는 평등해요 헤헤
음흉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죠

그렇게 힘을 들여 나는 오늘도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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