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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3 잠시 잊고 있던

Diary/오늘은

by 펭펭's 코코 2020. 2. 15.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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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해왔던 이전과 달리 진단을 받은 이후에 나는 컨디션이 감정을 결정했다. 최근에 얼굴에 일어났던 발진은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간지러움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먹는 것도 다시 부쩍 늘었다. 목요일(13일) 검사결과대로 간수치가 줄어든 덕분에 속이 편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러한 차도와 함께 마음의 여유도 다시 조금 생겼다.

  하지만 감정을 다이렉트로 때리는 일이 발생했다. 12일 새벽,  미국 대학에서 메일이 온 것이다. 작년에 진단을 받으면서 1년 연기를 해두었던 미국 박사과정에 올해는 합류할 수 있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펀딩(TA 혹은 RA와 같은 조교를 하는 조건으로 장학금, 기본보험, 생활비를 보장)을 제공하는 오퍼를 4개 대학으로부터 받았고, 그 중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학교에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지금이 모든 미국 대학들의 박사과정 어플라이 결과가 발표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나에게도 연락을 했나보다. 메일이 나를 더욱 가슴미어지게 했던 것은 내가 그 학교를 지원했던 이유인 교수가 본인이 이제 대학원 과정을 총괄(director)하게 되었다면서 본인은 특히나 나의 합류를 기대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박사과정 중에 공부하고자 했었던 불평등(inequality)과 관련해서 단연 돋보이는 학자이다. 그렇다고 원로교수도 아니고 연구를 한창 활발히 하고 있는데다가 대학원 담당 학과장이 되었기에 본 교수의 지도를 받는 과정에서 유익한 기회들을 많이 잡을 수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난 갈 수 없다. 작년에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할 당시에도 빠르게 잘 진행된다 하더라도 2020년에 나가기는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이식 후 최소 1년 정도는 휴식을 취하며 차도를 봐야하는데 학기가 시작하는 9월은 이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가자마자 새로운 환경, 언어, 어마어마한 학업 양 등 엄청난 스트레스가 나를 짓누를 것이다. 건강하고 멘탈 강한 사람들도 수척해진다는 박사과정 유학생 1, 2년차.  그렇게 작년에 했던 예상을 13일 외래진료에서 주치의가 확인해줬다. "불가능합니다." 깔끔했다. 

  본래 내가 가려던 길을 잊고 있던 것은 아니다. 여자친구는 월요일에 보스턴에 있는 학교로부터 합격 메일을 받았고, 같이 대학원을 다니던 원우들 중 올해 지원을 한 사람들도 있다. 다만 나도 언젠가는 유예했던 그 박사과정 장학금 오퍼를 거절, 아니 포기한다고 정식으로 답을 해야하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내 마음 속에서의 단념과 좌절과는 별개로 말이다. 

히크만 기능검사 후에 면역증강제를 맞으며 메일 답장을 보냈다. 갈 수 없다고, 최소한 올해는. 울컥할 것 같았는데 담담했다. 못 갈 것이라고 이미 예상했던 터인 듯 싶다. 증강제를 다 맞고 엄마가 기다리고 계셨던 병원 성당으로 갔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러냐고 원망의 기도를 드릴 법 했지만, 한동안 정체하던 혈소판 수치가 다시 반등한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싱숭생숭했던 요 며칠 간의 마음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 글을 쓰는 지금처럼 다시 돌아오겠지만..

 

강남성모병원 1층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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