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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9 예술 산책 (feat. 퓰리처상 사진전)

Diary/오늘은

by 황제코뿔소 2020. 8. 14.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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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연수랑 퓰리처상 사진전에 다녀왔다. 예술의 전당도, 퓰리처상 사진전도 오랜만이다.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을 찬찬히 살피고 오디오 가이드도 듣다 보니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그래서인지 보는 내내 커다란 감흥이 나진 않았다. 물론 이런 나들이는 나에게 언제나 환영이다. 연수와의 동행이라 새롭기도 했고 덕분에 무료로 관람해서 더욱 상쾌한 기분!

 

 

연수는 관람하는 내내 힘들어했다. 한 권위주의 정부가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들이닥친 경제위기를 감당할 수 없었던 많은 국민들은 아이를 내다버리고 이로 인해 장애가 있는 고아들을 위한 시설이 포화가 되었다는 열악한 상황을 담은 사진 앞에서 연수는 “아”하는 한탄의 소리를 냈다. ‘왜 저러지?’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수록,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되뇌일수록 더 힘들다. 연수는 그런 애쓰는 마음을 가졌다.

연수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도 분명 마음이 답답했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사진들 앞에서 특히나 그러했다.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폭파된 평양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사진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한번쯤 보았을 사진이다. 이 또한 미국 종군기자가 다리에 올라가 찍은 사진이고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6.25전쟁, 베트남전, 냉전, 이라크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등 시간이 흘러도 반복되는, 해결되지 않는 비극. 그 커다란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개개인들과 무심한듯 대하는 지구 반대편의 우리들.

아픔의 역사를 담은 사진들만 전시된 것은 아니다. 시카고 빈민가의 어린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은 행복을, 아이의 출산 순간은 경의로움을, 전설적인 야구선수인 베이브 루스의 은퇴 순간은 감동을 선사한다. 기념품 코너에는 왜 더 다양하고, 기념이 될 만한 사진들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지 아쉽다ㅠㅠ

 

아프가니스탄 취재 중 순직한 안야 니드링하우스 특별전이 바로 옆에서 열리고 있다. 입장권을 제시하면 제시하면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전시된 사진들 상당 부분이 구글링하면 다 나온다. 하지만 불펌하고 싶지 않다. 사진전 현장에서도 내부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 이 점은 참으로 좋았다. 사진 촬영이 허락되었다면 이른 시간임에도 붐비던 실내 전시관이 더욱 미어터졌을 것이다. 찰칵찰칵 소리 또한 상당히 거슬렸을테고. 퓰리처상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수상자들이 연도별, 카테고리별로 정리되어 있다.

이번 사진전은 1942년부터 올해까지의 수상작 130여 점을 공개했다. 일전의 전시와 겹치는 사진이 많긴 했지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진들도 있었다. 최근에 수상한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홍콩시위’와 ‘카슈미르’를 담은 올해 수상작 외에도 2019년에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김경훈 기자의 사진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는 난민 모녀를 담고 있다. 바지와 신발이 없는 소녀들과 엘사가 그려진 아이들의 옷을 입은 엄마의 얼굴에는 긴박함이 서려 있다. <차이나는 클라스>의 김경훈 기자 편을 시청한 바가 있어서인지 더 친숙하기도 했다.

다만 해당 사진의 캡션에는 오타가 있었다. 멕시코가 “멕스코”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유명한 퓰리처상 사진전이라면서 어찌 이런 실수가 있을 수 있는지.. 해당 실수 외에도 나와 연수는 캡션의 설명이 거슬렸다. 예를 들어, 암 투병 중인 미국의 한 소년이 휠체어 위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사진이 전시 후반부에 있다. 그 사진의 캡션에는 소년은 “결국 패배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꼭 “패배”라는 표현을 썼어야 했을까?

 

 

또 다른 아쉬움은 은연 중에 느껴지는 미국 중심성이다. 정치지도자 사진은 클린턴, 오바마의 사진이 걸렸으며, ‘감동의 사진’들 대부분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퓰리처상은 언론계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린다. 노벨상 중에서도 노벨문학상은 유럽중심주의라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예를 들어, 2011년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에게 주어졌고 이에 지역 편파성이 강하게 제기된 바 있다. 한국영화는 왜 20년 동안 오스카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냐는 질문에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는 ‘로컬’이라고 답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경에 국한되지 않고 발생하는 비극을 담아내는 데에는 퓰리처상의 성실함이 충분히 느껴졌다. 다만 빛나는 감동의 측면에서 다양성이 전시에 조금 더 반영되면 어떨까 싶다.

사진은 흐르고 움직이는 것을 일시정지 상태로 박제한다. 사진은 분명 자연을 거스르고 극복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반영하는 기술들 중 하나이다. 퓰리처상 사진전은 그 기술이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증거로서, 인간 보편의 감정을 끌어내는 훌륭한 도구로서 활용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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