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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6 다시 그리고 새롭게

Diary/오늘은

by 황제코뿔소 2020. 9. 1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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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에 있는 내 짐을 빼러 학교에 다녀왔다. 얼마만이던가. 내가 백혈병을 진단받은 이후, 그러니까 작년 3월 이후 첫 방문이다. 예기치 않은 떠남이었기에 무엇을 두고 왔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남겨둘 순 없었다.

미리 연락해 둔 현재 조교 대신 1년 반 전처럼 여전히 박사논문과의 사투를 벌이는 중인 선배들이 행정실 문을 열어주었다. 종합연구동에 자리한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실들은 학교에 상주하는 박사과정생들 혹은 박사(님)들이 사용하시기 때문에 아는 얼굴과 마주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역시 좁은 바닥인지라 내가 연구소를 갑작스레 그만두고 유학도 가지 못한 연유를 다 알고 있었다.

한동안의 근황 토크가 응원을 끝으로 마무리되고 본격적으로 짐 정리를 시작했다. 나의 논문 여분과 원우들에게 받은 논문들 외에는 모두 프린트물.. 연구소 조교의 특혜 중 하나가 자유로운 복합기 이용이었다. 나는 특히나 어떠한 종류의 글이든 종이로 읽는 것을 선호한다. 그 선호의 증거가 고스란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아있던 짐들이 고작 종이냐고 하기엔 그 글들을 읽고 쓰던 순간들이 하나같이 기억났다. 국내외 논문들, 수업 과제 및 페이퍼, 내 석사논문 원고들 그리고 유학 지원 때 작성한 라이팅 샘플 등등. 짐이라기보다 흔적이었다. 주저되었지만 모두 버렸다. 국내든 해외든 내가 학업을 다시 시작한다면 말 그대로 다시 시작해야하기에.

급한 일도 없는데 그냥 가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같이 온 펭귄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도교수님께만 연락을 드려보았다. 다행히 연구실에 계셨다. 여전히 고운 얼굴과 포근한 말투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곧 있을 수업 때문에 선생님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짧은 만남의 말미에 선생님께서 최근에 출판하신 책을 선물로 주셨다. 국제대학원에서 재직 중이신 남편 분이랑 함께 쓰신 책이었다.

 

 

두 분은 결혼 후 LA에서 함께 유학 및 육아생활을 하셨다. 거기서는 각자 다른 학교를 다니셨지만 결국 두 분 모두 국내 제일의 대학에 자리를 잡으셨으니, 경로 측면에 있어서만큼은 더할 나위없는 롤모델이었다.

이제는 나나 펭귄이나 유학을 가게 될 확률이 매우 희박해졌다. 나의 경우, 학교 측에서 장학금 및 입학 허가를 2년이나 연기해준 덕에 내년까지 유효하지만 공부를 다시 시작하더라도 낯선 미국 땅에서 나를 돌보아가며 학업에 매진하기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펭귄 또한 작년에 합격한 미국 유학을 1년 연기해두어서 내년까지 유효하지만 내가 유학을 안(혹은 못) 가는 것이 유력해지면서 유학이란 옵션에 대해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 지금 직장에 대한 만족감도 작용한 듯하다.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어느덧 아득해진 계획이다. 간만의 방문에서 마주한 건물들과 사람들 모두 그러했다. 익숙함 속에서도 아득함이 느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이 멈추어선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씁쓸함보다 개운함이 더 크다. 다시 그리고 새롭게 나아갈 길들이 기대된다.

 

곧 회복하고 나면 내가 하고 싶은 거 다하면 된다는 펭귄의 든든한 말이 귀에 맴돈다.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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