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기 전만 해도 기대감이 지극히 낮았던 작품인데 리뷰가 유례없이 길어져서 여러 포스팅으로 나누어 올리고자 한다. 영화 편식이 심한 나로서는 본래 같으면 보지 않을 법한 영화였다. ‘미국에서 이민자 동양인 가족 3대가 겪는 드라마’ 정도로 인식하고 나니 영화 속에 등장할 갈등 지점들이 지레 짐작이 갔다. 생활고를 기본으로 깔고 외부로부터는 차별, 내부로부터는 세대 차이와 위기 극복의 방법론 차이에서 갈등이 발생하겠거니 싶었다. 포스터와 예고편이 풍기는 따뜻한 톤의 영상미는 나의 기대감을 더욱 낮췄다. 시종일관 잔잔한 분위기를 이어가다가 말미에 가서는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러한 편견들에 더하여 <미나리>에 대한 나의 기대감은 배우, 감독, 스토리 그 어느 것도 아닌 오롯이 화제성, 그것도 해외(정확히는 미국)에서의 찬사에서만 비롯되었기 때문에, 굳이 이 영화를 보러 영화관까지 찾을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 멋진 영화를 놓치지 않고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도통 당신의 욕구를 강하게 드러내시지 않는 엄마 덕분이었다. <미나리>가 언론에 보도되기 즈음부터 궁금하다며 보고 싶다던 엄마와 달리 나는 큰 기대 없이 그렇게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울컥 감동했다.
잔잔한 음악 그리고 건물 하나 보이지 않는 평화로운 미국판 ‘시골’을 배경으로 달리던 이삿짐 트럭과 자가용이 우두커니 세워진 트레일러 앞에 멈춘다. 이곳이 앞으로 살아갈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 앞에서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가 짓는 표정은 너무나 다르다. 제이콥은 이 새로운 출발이 너무나 설레는 반면 모니카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모니카는 자신의 실망과 걱정을 숨기지 않고 이들은 시작부터 충돌한다.
가족의 마땅한 생활근거지에 대한 이 둘의 견해 차이는 영화 내내 이어진다. 모니카는 아들의 건강 때문에라도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견이지만 제이콥은 도시에는 없는 시골의 풍요를 기반으로 가족들에게 뭔가 해내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있는 이 둘의 시선은 한국에서 자신들이 성장한 배경이기도 하다. 영화는 모니카가 서울에서 나고 지냈고 시골에서 상경한 제이콥을 만난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고된 이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관객들에게 인물들의 대사로 넌지시 알려준다.
관객들은 자연스레 모니카의 편을 들게 된다. 우선, 모니카는 가족들이 트레일러에서 생활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아칸소로 온 듯하다. 아무것도 없는 땅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트레일러를 마주하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니카 앞에서 제이콥은 흙을 만지면서 바로 이것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라며 미소를 짓는다. 심지어 그는 모니카와 상의 없이 한국에 있는 자신의 동생들에게 돈을 부친 듯하다. 아들이 아픈 상황에서 뼈 빠지게 일한 돈은 한국으로 송금하고 함께 사는 가족들에게 내민 것이라곤 텅빈 땅 위에 처량한 트레일러라니, 오프닝부터 제이콥의 판정패다.
제이콥이 가족들을 데려온 곳은 자연환경도 그리 녹록지 않다.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들은 토네이도로 인해 불안에 떤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성공’해보겠다는 제이콥의 바람과 달리 대출을 받아 구매한 터는 이전부터 물이 부족한 땅이다. 결국 제이콥은 부족한 지하수를 충당하기 위해 생활수까지 끌어다 쓰게 되고, 트레일러에서는 물이 끊겨 기본적인 생활이 힘든 지경에 이른다. 함께 지내게 된 할머니가 하루아침에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가족들의 삶은 더욱 어수선해진다. 그런데도, 제이콥은 농사에만 혈안이 된다(<비바리움>에서 함께 사는 사람이 어찌 되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땅만 파는 남자 주인공이 떠오른다).
이쯤 되면 그가 밉게만 보일 법하지만,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진심이다. 그에게는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과 열심히 일해 온 지난 시간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이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조금은 본인이 그동안 꿈꿔왔던 방식으로 책임지고자 한다.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해오는 지역과 근접한 곳에서 한인들이 즐겨 찾는 농작물을 길러서 팔겠다는 야무진 계획이다. 판매처까지 미리 구해 놓는다. 그는 확신에 차 있다. 하지만 배우자는 그 방식이 그리 달갑지 않다. 그녀에게는 제이콥이 개척하고자 하는 낯선 길은 불안하기만 하다. 그 간극이 뚜렷해질수록 가장의 책임감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고, 자신이 고생한 시간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지난 세월을 살아 온 대한민국의 가장들의 표상을 보는 듯하다.
제이콥과 모니카의 차이는 결국 구원의 주체 그리고 의미에 있다. 두 부부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오면서 “서로를 구원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구원은 ‘한국이냐 미국이냐‘, ’도시냐 시골이냐’와 같이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이콥의 구원은 풍요를 의미한다. 그는 새로운 땅에서 시작한 이 농장사업이 성공해야만 만족스럽지 못한 이제까지의 생활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니카에게 구원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가족이었다. 그녀에겐 비가 올 때 우산보다 비를 함께 맞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우산이 있어도 어느 정도의 비는 맞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디를 가더라도 고난과 시련을 맞이하게 되어 있듯이 말이다. 심지어 불행은 가끔 몰려서 찾아온다. 가족이 함께 긴 터널을 지나야 할 때 모니카는 자신은 아칸소에 남아서 시작한 일의 끝을 어떻게든 보겠다는 제이콥을 보고 함께 다짐했던 구원의 의미가 너무나도 달랐음을 깨닫는다.
모니카는 자신이 그에게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바로 그 날이 아들 데이빗의 상태가 기적적으로 호전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날이고, 제이콥이 난관을 이겨내고 이제 드디어 거래처까지 확보하게 된 날이지만, 더이상 그들이 같은 길을 갈 수 없음을 제이콥에게 전한다.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예기치 못한 상황이 그들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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