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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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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펭's 코코 2021. 6. 1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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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선생님’이다. 힘들게 따낸 미국 박사과정 장학금은 올해로 만료되지만, 현재 내 상태로 유학은 무리다. 나중에 국내에서 학업을 이어나가더라도 일단 학원에 계속 종사할 계획이다. 학원에서 맺은 선생과 학생이라는 관계는 그야말로 일시적이다. 특강 수업에서 잠깐 만나는 학생들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중에 꼭 연락드리고 싶다는 학생들, 1년 가까이 꾸준하게 담당하게 되는 학생들, 일반 강의가 아닌 과외처럼 밀착된 형태로 가르치는 학생들도 있지만 내가 그들을 대하는 진심과는 별개로 그 관계의 속성은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전 포스팅에서 인용한 베버의 문구(채소를 구매하듯 돈을 내고 교육 서비스를 구매했으니 그 이상 그 이하도 기대하지 않는 태도)가 사교육 시장만큼 어울리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내가 일하는 대치동 학원가가 이러한 ‘기브앤테이크’가 더 확실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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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님'

‘선생님’은 학교라는 공간과는 떼기 힘든 호칭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는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뜻하는 정도이다. 직업적 의미만을 담고 있는 기본값인 것이다. 대학에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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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던 학교에 국한되는 특성인지 모르겠으나, 대학원에서는 ‘교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변화는 학부생일 때보다 (더) 긴밀해진 관계와 학업이라는 분야에서 나름의 업적을 선취한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뜻하지만, 지도교수 혹은 존경하는 교수님에게조차 왠지 ‘스승’이라는 호칭은 어색하다. 내가 미국 유학을 지원할 당시 추천서를 부탁드렸던 교수님 3분 모두 학자로서 그리고 어른으로서 존경하는 분들인데, 이번 스승의 날 즈음에 드렸던 안부 메일의 제목은 “선생님께,”였다. 어렵게 박사학위를 받고 그보다 더 어렵게 교수가 되어도, 스승이 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교수라는 직업은 교육자이기 전에 학자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학교 선생님만큼이나 익숙한 ‘선생님’이 의사 선생님이다. 의사의 전문성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정도로 유독 특별하며, 그 때문에 의사의 소견(所見)은 결코 소견(小見)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상식적인 이야기는 막상 환자가 되었을 때 절감하게 된다. 백혈병을 진단받은 이후 내게 의사는 정말 선생님이 되었고 병원이라는 곳은 또 다른 학교가 된 것처럼 말이다. 본래 맨 처음 진단을 받은 병원은 현재 주치의가 있는 병원이 아니었다. 슬퍼할 정신도 없이,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가장 잘 알아주는 의사 선생님과 병원을 찾았다. 울음을 참지 못하는 엄마를 앞에 두고서도 너무나 차분하다 못해 냉정하기까지 했던 첫 진료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새 2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절함보다는 까칠한 모습을 더 많이 봐 왔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지금 이렇게까지 잘 회복될 수 있었던 데에는 (힘겨운 시간을 견뎌낸 나 자신과 곁에서 나를 보살펴주시고 조혈모세포까지 공여해준 엄마를 제외한다면) 단연 일등 공신이 아니겠는가. 어떠한 항암제를 쓸지, 누구의 조혈모세포를 이식할지, 항암 외에 어떠한 치료를 병행할지 등 내게는 너무나 중요한 결정을 다 내린 사람이다. 병원에 방문할 때마다 혈액병원에서 마주치는 소아암 환자들도 내게 선생님이다. ‘어른’은 선생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 나오며
우리는 영화에서 참된 ‘스승’을 만나기도 한다. 훌륭한 어른 혹은 선생을 만나 주인공이 성장하는 감동적인 작품은 너무나 많다. <죽인 시인의 사회>는 단연 빼먹을 수 없는 영화이다. 학생들의 귀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속삭이는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특정한 생각이나 지식을 가르치기보다는 각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키팅’을 연기한 로빈 윌리엄스 안타깝게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굿 윌 헌팅>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언제나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심리학 교수인 ‘션’이 천재 반항아 ‘윌’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윌’에게 내어 준 믿음과 위로 때문이다. ‘션’은 자신도 ‘윌’처럼 아픔이 있으며, 여전히 그 상처를 겪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It’s not your fault”라는 ‘션’의 위로에 ‘윌’은 뜨겁게 눈물을 쏟아낸다. 일전에 리뷰한 <디태치먼트>(https://hworangi.tistory.com/41)가 인상 깊었던 이유도 ‘선생님’ 또한 아프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을 상기하는 부분 때문이다.

공부의 옛 글자는 사람이 도구를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란 삶을 통하여 터득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세계와 인간의 변화입니다. 공부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존재형식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존재형식은 부단한 변화입니다.
- <공부>, 신영복


뛰어난 전문성, 완전무결한 도덕성, 난공불락의 정신력은 경탄을 자아내고 배움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스승’이든 ‘선생’이든 우리의 마음은 사랑이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게는 일상적으로 배움과 감동을 주는 존재가 곁에 있어 참으로 축복이다. 나의 부족함을 마주하게 하시고,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함을 스스로 상기하고 노력하게 하시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지침이 되어주시는 나의 스승이자 선생인 이정숙 여사에게 이번 시리즈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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