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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집」 안희연 산문집: 작은 말을 재료삼아 담백한 글을 구워낸, 따뜻하고 맛있는 책 (feat. 창비 시인학교)

Library/book

by 황제코뿔소 2024. 1. 2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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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이란 이름은 낯설었지만 그의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의 제목은 익숙했다. 그의 이름을 본격 알게 된 것도, 그의 시집이 아니라 산문집 『단어의 집』을 구매하게 된 이유는 창비 시인학교 때문이다. 

 

창비 시인학교는 작년 7월부터 6주간 창비 서교빌딩에서 진행된 강연형 모임이다. 

“6명의 젊은 시인들에게 전해 듣는 생생한 창작 노하우! 시의 언어부터 이야기, 이미지, 음악, 시공간에 이르기까지 시 창작 과정을 함께 살펴보고 시를 써 봅니다.”

 

6명의 시인들의 대부분은 나에게 생소했다. 그나마 김현, 박소란도 그들이 쓴 짤막한 글과 인터뷰 뿐, 그들의 시집을 읽어본 것은 아니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시집의 수에 비해 평소에 시를 읽는 정도가 극히 간헐적인 나에게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

 

안희연 시인은 1번째 연사였다. 6번의 모임에 관한 짤막한 소개글들 중 가장 흥미를 돋구었다. [시와 언어, 단어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시에 대해 막연한 흥미만 가득한 내가 아장아장 걸음마라도 조금 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단어의 집』(2021, 한겨레출판)을 펴내며 스스로를 '단어 생활자'라 소개했습니다. 이때의 단어 생활이란 단어를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로만 여기지 않고, 사유의 재료로 확장해서 생각하는 관점을 반영합니다. 국어사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확정된 정의가 아니라 나만의 참신한 정의를 새로 써 내려가는 과정이지요. 이는 한 편의 시를 써 내려가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때로 시는 단어로부터 출발하곤 하지요. 시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어떻게 같거나 다를까요? 한 단어는 얼마나 거대한 세계를 거느리고 있을까요? 함께 궁리해 봅시다.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단어의 집을 만들어보는 시간.

 

그래서 『단어의 집』을 구매했다. 하지만 6번의 모임들 중 안희연 시인과의 시간을 유일하게 불참하게 되었다. 시인학교가 끝난지도 6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단어의 집』을 읽고 나니, 그 때 저자와 함께 문학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 아쉬움이 커졌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의 제목은 모두 단어이다. 과학·기술 분야의 용어들이거나 학술·전문 콘텐츠에 나올 법한 단어들이 대부분이다. 길항, 휘도, 블라이기센, 흑건, 구득, 덖음, 모탕 등 최소한 일상적으로 잘 쓰지 않는 이러한 단어들에서 쫀득한 글을 뽑아낼 수 있는지 놀랍다.

 

『단어의 집』을 뜻깊게 읽은 이유는 소재 하나에서부터 이야기를 수려하게 풀어내는 뛰어난 필력에 감탄하는 재미 그 이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에세이, 산문집 중에는 자신의 이야기가 가득하지만 텅 비어있는 책들이 너무 많다. 몇몇 독서모임 참여하면서 내 의지와 무관하게 그런 책들은 읽은 적이 있다. 경험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사실상 자기 자랑만 가득하거나 그 당시에 느꼈다고 볼 수 없는 사후적인 의미부여 등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괴롭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그 책을 붙들고 시간은 아까워진다. 그러한 책들은 사실 저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한편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세상 어떤 것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강한, 성공한,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쓰는 것 같지는 않다. 약하다 못해 순두부처럼 물렁거려도, 늘 실패하더라도, 구멍 뚫린 봇짐을 이고 지고 가느라 흘리고 놓치는 게 일상이어도, 내 영혼이 세상과 닿는 접촉면이 점점 더 넓어지기를 바라며 쓴다.” (p.204-205)

 

저자 개인에 관한 자잘한 내용보다는 시에 대한 진심 때문이다. 자신의 진행했던 시 수업에 관련한 이야기, 일상에서 “시를 예비하는” 단어를 “파밍”하는 모습들, 텅빈 여백에 써내야만 하는 창작자이자 노동자로서 방전된 상태와 이에 대한 대처법 등 [기-승-전-‘시’]인 책의 내용에서 저자가 시 안에서 사유하고 살아간다고 느껴졌다. 모든 ‘시인’이 그러려나?

 

 

요즘 부쩍 ‘아이’를 생각한다는 점과 약간은 관련있는 듯한데, 아이가 등장하는 챕터인 ‘모탕’과 ‘기저선’의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모탕은 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 밑에 받쳐놓는 나무토막을 말한다. 저자는 ‘좋은 질문’이 모탕이라면서 초등학교에서 있었다는 한 일화를 소개한다. 태풍 때문에 이른 귀가 조치가 내려지자 한 아이가 “선생님, 그런데 태풍이가 왜 우리 학교에 와요?”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세상에 대해 좀 안다는 꼿꼿한 자세로 무엇도 새롭지도 재밌지도 않던 자신을 깨워준 질문이라며 자신이 선생님이라면 어떠한 답변을 할지 고민해본다. 

1. 선생님이 태풍이 혼내줄게

2. 태풍이는 사람이 아니라 기상현상이고, 북태평양 남서부에서 발생하여 아시아 대륙 동부러 불어오는 맹렬한 열대성 저기압을 일컫는 말로...

3. 태풍이가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었나 봐. 삶은 끝없는 공부이니 태풍이의 출연으로 우린 많은 것들을 새롭게 배울 수 있을 거야.

4. 쓸데 없는 생각 말고 얼른 집에 가!

5.

당신은 5번 보기를 어떠한 문장으로 완성하겠는가? 어떠한 것들을 담고 싶은가?

 

‘기저선’에는 초등학교 1학년들을 데리고 진행한 동시 쓰기 수업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마음이 어디 있냐는 질문에 마음은 모든 곳에 있다는 한 아이의 대답. 『단어의 집』을 읽은 이후에 종종 일상에서 마주하는 단어와 대상을 바라‘본다’. 점심으로 싸게 된 유부초밥, 하루가 지난 라떼 표면에 몽글하게 맺힌 덩어리 등을 보고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며, 이전에는 없던 나만의 문학의 순간을 가지고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가 ‘시’를 소재로 ‘본다’는 행위의 중요성을 알게 했다면, 『단어의 집』의 저 짧은 대목은 내게 시와 문학이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와닿게 했다. 

 

가끔은 ‘이 돈도 안되는 글을,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내가 왜 쓰고 있지?’ 하는 자괴감을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해소해준 저자의 다음 문장들로 『단어의 집』에 대한 리뷰 포스팅을 마친다. 

어떤 문장이라도 좋다. 백지 안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만의 은밀한 다락, 혹은 지하실을 열어 볼 수만 있다면. 

내가 쓴 문장이 나를 보여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존재들이고, 살아 있다는 건 얼고 녹고 끓고 흩어지는 모든 순간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p.174)

 

p.s. “‘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따뜻한 허밍”이라는 제목으로 『단어의 집』의 뒷표지에 기재된 추천사는 창비 시인학교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시간을 주관한 박연준 시인이 썼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야 보이는 추천사를 다시 읽어보니, 책을 탁월하게도 표현하고 있다.

이 책엔 " 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일상과 걸음, 시선과 사유, 다정한 태도가 담겨 있다. 이야기는 단어에서 시작해 생활의 복판에서 끝난다. 문장은 쉽고 따뜻하며 빛난다. 언어를 오래 살피는 사람이 종국에 어디에 도착하는지, 그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잘 살고 싶다는 의욕이 솟아난다. 읽는 내내 귀가 활짝 펼쳐져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가 내는 소리라면 허밍이라도, 단 한 박자도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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