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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by 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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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제코뿔소 2020. 5. 2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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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항해 속에서

문학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는 어니스트 해밍웨이. 그의 작품을 이제야 제대로 읽어보게 되었다. 소설의 대부분은 노인이 홀로 바다에 나가 커다란 물고기를 잡고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다. 그 속에는 노인이 미끼를 종류별로 어떻게 관리하는지, 물고기와의 팽팽한 대치 속에서 자신의 몸과 배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등 어부의 직업적 특성이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있다. 영화든 책이든 등장하는 직업의 전문성이 디테일하게 다루어지는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신뢰가 간다. 헤밍웨이가 노인의 동작 하나하나를 자세히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생전에 낚시를 즐겼기 때문이다. 노인의 꿈에 등장하는 사자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것도 사냥에 대한 작가의 아련한 기억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노인에 자신을 투영한 헤밍웨이는 어떤 말을 담고 싶었을까?

 

 

나는 노인의 항해에서 우리의 인생을 읽었다.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내던져진 이 세상을 하루하루 삼켜내듯이, 노인도 “이젠 정말이지 돌이킬 수 없게 ‘살라오’, 즉 운수가 완전히 바닥난 지경”이지만 묵묵히 배를 다시 바다에 띄운다. 어부라는 자신이 평생 걸어온 그 길 위에 멈춰 서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과거에 이미 수천 번이나 증명해 보였다는 사실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그걸 다시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다. 언제나 매번 새로 처음 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과거를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p.69)

노인에게 바다는 엘 마르(el mar)가 아니라 라 마르(la mar)이다. 모터보트를 타고 다니는 젊은 어부들에게 바다는 경쟁자 혹은 적이지만 노인은 “언제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고, 큰 호의를 베풀어주거나 거절하는 어떤 존재”로 생각했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살면서 뜻밖의 행운을 만나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역경에 만나게 된다.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지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결코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 인생을 매번 극복의 대상으로만 여기기에는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저항하고 이겨내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렵다.

그렇다고 수용의 자세가 수동적인 삶을 의미하진 않는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노인은 온 힘을 다해 잡은 고기를 이제 상어로부터 지키고자 또 다른 사투를 벌인다.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 물고기는 뼈밖에 남아있지 않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길이의 물고기 뼈는 집으로 돌아와 사자 꿈을 꾸며 단잠에 빠진 노인을 대신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아.” (p.108)

무엇이 노인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끈기로 이뤄낸 성취의 경험이다. 노인은 자신의 운이 이제 다했다고 푸념하지만 자신의 고기 잡는 기술과 결연한 의지에 대한 확신이 있다. 노인은 젊은 시절에 카사블랑카의 한 술집에서 꼬박 하루 동안 벌인 팔씨름 시합에서 이긴 기억을 떠올린다.

자신감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 줄 경험은 정말 소중한 자산이다. 고백컨대 백혈병을 진단받은 이후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여러 층위에서 발생하는 제약들과 불안감보다는 이전과 달리 위축되어 있는 나 자신이다. 난 그 누구보다도 내 자신에 대해 자신있어하던 사람이었다. 노인이 자기가 이기고 싶다는 마음만 확실히 먹으면 상대가 누구든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듯이 나 또한 그러했다. 내가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이뤄냈었다. 용기를 내어 선택한 진로에서는 시작 단계였지만 나름의 인정과 다음 단계로의 티켓을 손에 쥐었었다. 그러나 삶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인 건강이 흔들리면서 다른 사람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흔들리게 되었다.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라졌다
- 한강 <그때>,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그럼에도 나의 많은 부분은 그대로이다. 쉽지 않은 싸움이고 승리의 여부를 온전히 내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노인처럼 끝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다 할 것이다.

노인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소년”이다. 나에게도 마음을 굳건히 다지도록 하는 감사한 존재들이 곁에 있다. 엄마와 펭귄을 비롯한 가족들도 있지만 소년은 내게 친구 같은 후배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노인의 다친 손을 보고 눈물을 쏟는 소년처럼 항암으로 빡빡이가 된 나를 보며 헤어스타일이 찰떡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인생은 주어진 몸으로 홀로 걸어가는 것이지만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 의지의 형태는 분명 다양하다. 소년은 끊임없이 노인으로부터 배움과 존경을 읽어내고자 했고 노인은 외로운 사투 속에서 소년과 함께하는 시간을 상상하고 기억하며 힘을 냈다. 나의 가장 빛나는 시간에 만난 그들과의 관계가 나로서는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노인과 바다」에서 내게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긴 부분은 노인과 소년의 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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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유능한 어부들이 많을 테고 그중엔 훌륭한 어부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최고는 할아버지뿐이에요."(p.24)

「노인과 바다」는 길지도 않은 분량과 복잡하지 않은 플롯 속에 인생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물고기 그리고 상어와 벌이는 사투가 핵심 소재이지만 그 감동은 거친 협곡의 급류처럼 몰아치기보다는 넓은 바다의 잔잔한 일렁임처럼 다가온다. 고전의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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