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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침묵』by 엘링 카게

Library/book

by 황제코뿔소 2020. 6. 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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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소리

자기만의 침묵은 엘링 카게라는 극지 탐험가의 침묵 체험기이다. 다짜고짜 책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저자는 탐험가인 동시에 변호사이자 출판사 CEO이며 미술품 수집가이자 세 아이의 아빠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독특한 이력을 지닌 개인의 경험담만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이에 동의하기 쉽지 않다. 침묵이라는 중심 주제가 있지만 내용이 과도하게 저자의 의식의 흐름대로 그리고 상당히 단편적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은 분명 침묵이라는 주제에 공통적으로 묶여있지만 그 끈이 상당히 느슨하다. 음악, 문학, 미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건드리지만 그 깊이는 얕기 그지없다. 본 책의 그럴듯한 표지와 삽입되어 있는 다른 그림들도 허세로 느껴졌으며, 침묵이라는 주제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듯 언급하는 부분들도 나로서는 거슬렸다. 또한 마음 속 침묵(inner silence)을 빚어내는 33개의 질문과 대답이라는 소개말과는 달리 침묵으로 안내하는 질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자 자신만의 대답이 적혀있지도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턱대고 침묵을 예찬하고 있을 뿐이다. 각자가 경험한 침묵은 분명 다 다를 것이기에 세계 최초로 남극점, 북극점,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경험에 초점을 맞췄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자기만의 침묵
국내도서
저자 : 엘링 카게(Erling Kagge) / 김민수역
출판 : 민음사 201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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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책은 평소에 음미해보지 않았던 침묵이라는 주제를 골똘히 곱씹어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침묵은 단순히 소리의 부재가 아니다. 침묵해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소리가 그러하다. 홀로 설악산 12일 종주를 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등산을 매우 좋아하지만 홀로 산을 오른 적이 거의 없다. 그때 나는 초반 코스인 천불동 계곡에 진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렸다. 그러나 계곡에 다다르고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자 나는 음악을 껐다. 온전히 나와 산과의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 시간 중 청각적인 경험은 분명 일부분이었지만, 대상과 나만 남은 상황에서 내가 듣고자 했기에, 그래서 ‘off'했기에 허락된 소중한 조각이다. 나는 그때의 새소리, 바람과 나무가 함께 내는 소리 그리고 나의 발걸음이 내는 소리가 나만의 침묵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당신의 침묵은 어떤 소리인가?

혹시...... 물에 머리 넣는 걸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 이장욱, 유명한 정희

나는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말할 줄도 모르던 때, 말할 줄 밖에 모르던 때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지금도 내겐 듣기보단 말하기가 익숙하다. 게다가 나는 전형적으로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 내용이 껄끄럽더라도 적절한 형식에 옮겨 담아 전하는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그러한 내 자신에 만족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발화가 아닌 침묵이 나에게 더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마음의 소리가 침묵을 매질로 삼아야만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때 말이다. 또한 조금 더 들었더니, 기다렸더니 내가 바라던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황들을 마주하며 나는 내 안의 간지러움을 참아내는 법을 배웠다. 물론 아직 부족하다.

그 시작은 저 밑 어딘가

태양처럼 요동치는 심장을 지나
목젖이라는 방지턱에 다다른다

선택의 기로이다
삼켜볼지 내뱉을지

승천을 앞둔 이무기처럼 인내하자
!
덜컥임은 아직 때가 이름을 의미하지 않는가

아니다 이미 여기까지 올라왔다!
성스러운 하늘은 저 밖이다

되뇌임의 단계이다
날아간 간지러움은 되돌릴 수 없음을
이 세상 모든 삐죽한 존재들처럼

가시 돋친 강아지풀을
겨우 참아내던 어제의 그 순간이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간질인다

- 배병진, <간질간질>

마지막으로 이 책이 내게 오게 된 경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생일 축하한다며 이 책을 툭 내밀던 녀석은 일명 도비.’ 과학생회를 같이 해보자고 제안하던 때만 하더라도 나에게 존칭을 써가며 꾸벅 인사하던 녀석이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된 2012년 이후 지금까지 녀석은 꽤나 오랫동안 침묵해왔다. 관계도 유기체이기에 물을 주고 돌봐야만 유지되고 자라난다. 우리의 관계에선 내가 혼자 가꾸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내겐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아끼는 인연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녀석이 술 약속을 파토내고 며칠 후 나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그로부터 며칠 후 녀석은 환자복을 입은 내 앞에서 실없는 소리만 늘어놓더니 1층에 내려가 엉엉 울었다. 설상 스쿠터나 개 썰매 그리고 식량 저장소 없이 세계 최초로 북극에 도착한 사람이라는 본 책의 저자 소개에서 녀석은 분명 나를 읽었을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저자처럼 나도 어서 이겨내라는 녀석의 조용한 응원이 또렷하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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